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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찻사발축제에서 울려 퍼진 문경새재아리랑문경찻사발축제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지난 4일 오전 11시 문경새재오픈세트장 광화문 옆 주무대에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가 아리랑 공연을 선사했다. 이날 ‘계절의 여왕 5월’이란 말이 실감 나게 청명한 하늘과 연초록 나뭇잎을 흔드는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5월 첫 연휴 첫날 나들이 나오신 관광객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정적인 무대와 환호하는 관객이 하나가 되는 공연을 개최하였다. 공연의 주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으로, 찾사발축제를 찾아오신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신명나는 아리랑 공연을 펼쳤다. 이만유 위원장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결성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고 실제적 '아리랑고개'가 문경새재라는 것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보급하고 확산하는데 힘을 모우고 있다."라고 전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찾아가는 아리랑공연과 아리랑학교,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통해 문경새재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다. 이날 공연 사회는 황동철 이사가 맡아 진행하였고, 한두리국악단(단장 함수호)이 협연하였는데 함께한 해금, 장고, 징, 북, 피리, 태평소, 가야금이 무대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첫 무대에서 해설을 맡은 이만유 위원장이 공연 주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경새재아리랑 유래 및 특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한복을 곱게 입은 아도위합창단이 문경새재아리랑, 문경풍년아리랑, 본조아리랑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 국악인 3명이 노래가락, 태평가, 창부타령으로 분위기를 돋구었다. 이어서 휘날레에서는 관객과 어울려 춤추는 하모니카 연주와 신명나는 선반설장고 공연으로 마무리하였다. 아리랑축제의 노래/ 이만유 싱그러운 5월 찻사발축제장 무대 위에 알록달록 핀 꽃 꽃 꽃 문경새재 아리랑고개 한민족 혼이 담긴 아리랑 관광객과 어울려 부른 노래 팔랑팔랑 나비처럼 멀리멀리 날아가면 오천만 가슴속으로 꽃물처럼 살포시 스며드는 우리의 소리, 희망의 노래 문경새재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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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8)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감상 청춘에 사할린으로 와 여든세살이 되었다. 타향살이에 살림살이는 구차했고 서른다섯 청상과부 설움마저 감내해야 했다. 자탄 애탄하며 살아 온 삶이 돌아보니 원통하고 허망하다. 무정한 세월에 그 한을 어이하리. 아리고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아리랑고개를 노래로 넘는다. 기댈 데 없는 허랑한 심사를 민체로 흘려 풀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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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6)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고개 한번 가면 소식 없던 탄식의 고개 업고 지고 쫓겨서 흘러가더니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 넘어 오네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헤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고개 이천이십사년 새날에 조선족아리랑을 쓰다 불긍거후루 주인 한얼 이종선 감상 일제치하 조선의 백성들은 폭정에 못 이겨 고향을 버리고 북간도로 만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불모의 땅을 일궈 희망을 싹 틔웠고, 간난의 고통을 아리랑을 부르며 이겨냈다.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꿋꿋하게 나아갔다. 피눈물로 탄식하며 넘던 고개를 희망을 서로 다독이며 기쁨을 업고 지고 다시 넘어 돌아온 것이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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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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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4)구월단풍 두견이 울음 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 주소. 아리랑 강남은 천리나 언덕 정든 님 올 때만 기다린다네. 아리 아리 넘어 넘어서 구월단풍 좋은 시절에 두견이 음 음 음 우지를 말라 감상 강남 간 님 오기만을 봄부터 여름 지나도록 언덕에 올라 기다리는데, 오마던 이는 소식이 없고 어느덧 구월에 단풍만이 곱구나. 세월을 재촉하는 두견이 울음에 가슴이 철렁한다. ‘가을단풍 두견이 울음’을 주제어로 뽑아 부각시키고 본문을 흘려 써 하단에 배치하였다. 작품구성을 위한 장법으로 노래의 내용과 상치될 수 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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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리랑’을 아십니까?‘일본아리랑’을 아십니까? ‘일본아리랑’ 40종, 1931년부터 1965년 까지 일본 속에서 제작되어 음반에 수록되어 음원이 확인 되는 아리랑 종류가 40여 종이 확인이 된다. 이를 ‘일본 속의 아리랑’ 또는 ‘일본아리랑’이란 이름으로 논하는 자리가 펼쳐진다. 그동안 남북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중국이 자국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이웃나라 일본인들이 듣고 부른 아리랑이 40여종에 이른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1932년 소화시대 최고의 작곡가 고가마사(古賀政男) 編曲 佐藤惣之助 作詞에 淡谷のり子와 長谷川一郎(蔡奎燁)이 부른 ‘アリランの唄’ 등이다. 이런 아리랑이 1965년까지 발매된 음반에 수록된 것이 53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가수 스가와라 스즈코(菅原 都々子)가 자신이 부른 아리랑만해도 6종(‘아리랑’, ‘아리랑 달밤’, ‘아리랑 애가’, ‘그리움은 아리랑고개 넘어’, ‘아리랑 이야기’, ‘아리랑 애가 이야기’)이나 된다. 그리고 이를 SP·LP·EP 음반을 발매하며 여기에 60여번이나 아리랑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는 매우 주목할만 한 사항이다. 그런가 하면 장르에서도 엔카, 전통성악 신나이, 째즈 형식의 아리랑도 있고, 영화, 미술, 공연 분야로도 확대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에 의해 아리랑문화를 형성시켰다. 이는 일본의 음악적 개방성에 의한 아리랑 정서 수용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피압박 민족 ‘고난극복 메타포(metaphor)’로서 아리랑의 보편 가치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아리랑’ 40여종의 곡명을 살피면 가장 많은 것은 아무런 수식 없이 쓴 ‘아리랑’(アリラン)이다. 1931년 첫 아리랑부터 1965년까지 12가지가 되는데, 8가지는 곡조가 ‘본조아리랑’이다. 가사도 1, 2절은 거의 본조아리랑을 수용하고 있다. 후렴도 반드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アリランアリランアラリヨ アリラン峠を越えゆく)를 썼다. 또한 3, 4절은 모두 개사한 것이다. 여기에 ‘노래’라는 의미로 쓰이는 ‘アリランの唄’(小唄, 節 포함)가 13종인데, 이 역시 거의 곡조는 본조아리랑이다. 이 경우는 1절과 후렴 전행은 같으나 2~3, 4절을 개사한 것이다. 이 같이 두 경우는 번안작품이 분명하다. 이는 언급한 바 있듯이 ‘일본아리랑’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것은 1926년 개봉된 영화‘아리랑’의 주제가임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悲歌’, ‘哀歌’, ‘夜曲’, ‘新曲’이 각 1종이다. 주제(主題)가 짐작이 된다. 지명을 쓴 것은 단 두 가지만 확인된다. 만주아리랑(満州アリラン-1937)과 도쿄아리랑(東京アリラン-1959)이다. 같은 곡명은 アリラン夜曲(1935)과 아리랑 항구(アリラン波止場-1960) 이 각 2종이다. 그리고 서양 음악 리듬을 제목에 쓴 경우가 두 가지인데, 아리랑룸바(アリランルンバ-1952)와 아리랑맘보(アリランマンボ-1954)이다. 1950년대 일본의 댄스 음악의 유행상을 짐작케 한다. 장르상 주목하는 작품도 있다. ‘가요이야기(歌謡物語)’ 가 두 작품인데, ‘아리랑가수’ 스가와라 쓰즈코의 두 작품이다. 그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한편 ‘고개’를 쓴 것은 한 종이 있는데, ‘고개 상’(峠)을 쓴 ‘아리랑고개 (アリラン峠-1951)이다. 한자권에서는 주로 고개를 ’嶺‘을 쓰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쓴 것이 확인되었다. 이외의 곡명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추억(アリランの思ひ出-1933) ‘가요이야기 아리랑애가 엘레지’(歌謡物語アリラン哀歌 エレジー1951) ‘가요 아리랑이야기’(歌謡物語 アリラン物語-1952) 울지마 아리랑처녀(泣くなアリラン娘-1952) 아리랑 달밤(アリラン月夜-1953) 동경아리랑 고개 저편(憧れはアリラン峠の彼方-1954) 아리랑 자장가(アリラン子守唄-1955) 아리랑 고개의 추억(アリラン峠の思い出-1960) 이상의 곡명에서 작품의 주제를 어느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즉, ‘이별의 정한’ 내지는 ‘과거 회상’이 된다. 30년동안 발표된 전체 곡명 중 ‘아리랑(アリラン)’과 ‘아리랑우타(‘アリランの唄)’를 쓰는 것이 절반에 이른다. 곡조와 후렴 전행 또는 후행을 거의 공통으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아리랑’ 주제가 또는 ‘본조아리랑’의 번안(飜案) 작품들이다. 본조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이를 대상으로 4인이 모여 이에 대한 의미와 성격 등을 논의 한다. 자료를 유튜부에 정리하여 검색을 가능케 한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 이를 분석 해제와 번역을 한 ‘라일락회’, 가장 오랜 재한 주재 일본인 구로다 가쓰히로(黑くろ田だ 勝弘かつひろ)기자,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이 함께한다. 주최는 ‘라일락회’, ㈜국악신문이 후원한다. 22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빌딩 회의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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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 세워진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에 부쳐일주일 전부터 강원도에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 소식을 듣고 정선 아우라지에 갈 채비를 했다. 우리는 주말에만 운행하는 아우라지 가는 정선아리랑 열차 첫 차를 타고 드디어 아우라지역에 내렸다. 작년 12월 5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 기념비 제막식에 오고, 이후 건립 100일기념 공연, 그리고 오늘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같이 왔다. 이 기념비에 세워진 이름들을 보니, 벌써 두분이 안계시다. 우리를 리더해 주신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 회장이신 '아리랑 명인' 정은하! 그리고 상주아리랑보존회 김동숙 회장님 하얀 눈처럼 아름답게 살다가신 정은하 선생님. 그립고 그립습니다. 우리는 비를 향해 인사를 하고 아리랑을 불러 드렸다. 아라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다 아리랑의 시원설을 있는 정선 땅에 이 큰 돌을 내놓아주신 정선군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내외 아리랑보존회, 그리고 동포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여!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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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소설집 ‘박연의 삶과 꿈 흙의 소리’[내 책을 말한다=이동희] 시골 옛집으로 내려온 지 꽤 오래 되었다. 나가던 데서 정년을 하고 늘 노래를 하던 고향으로 온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고향 마을을 떠났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형편이 안 되니 1년만 쉬라고 하여 아버지가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멀건히 놀고 있다가 피란을 갔고 낙동강이 끊어져 되돌아 왔다가 다시 나가 동서남북을 떠돌며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때 6. 25 한국전쟁으로 불탄 터에 향과 앉음새를 비슷하게 하여 흙집을 짓고 거창하게 옥호를 귀경재歸耕齋라 하였는데 논밭은 한 뙈기도 없다. 옛날에 다 팔아 남의 것이 된 지 오래고 푸성귀를 심은 텃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글밭을 간다는 문경文耕을 생각한 것이지만 생각 뿐 말 뿐 잘 안 되고 있다. 흙집이라고 하였는데 짚을 섞어 찍은 흙벽돌로 벽을 쌓은 것이다. 도배도 하지 않고 방바닥도 장판 대신 돗자리를 깔았다. 흙이 숨을 쉬게 하고 흙내를 맡기 위해서이다. 농촌 마을은 온천지가 다 흙이지만 흙냄새를 차단하는 구조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오랜 동안 콘크리트 숲 속에 살며 찌든 때문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마늘을 한 접 사서 다용도실에 걸어놨는데 얼마 안 가서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시멘트의 독성을 다 마시며 살고 있는 단적인 예이지만 어디 마늘뿐이고 사람뿐이겠는가. 그동안 흙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다. 땅에 대한 얘기도 쓰고 농촌 농민 시골 얘기를 많이 썼다. 땅과 흙이니 흙바람 속으로이니 서러운 땅 서러운 혼이니…… 농촌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다 흙타령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보니 그런 얘기를 많이 쓰게 되었고 이제 마감을 해야 되는 시기에 생각해 보면 왜 그런가, 그게 뭔가 싶다. 은사인 무영無影선생이 1946년에 소설집 '흙의 노예'를 내고 3년 후 민중서관에서 '산가山家', '향가鄕歌'를 출간하면서 무영농민문학선집 1권 2권이라고 붙였다. 그때 이만하면 농민소설가가 된 것이 아니냐며 농민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흐뭇하게 토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농촌 농민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글을 쓰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무척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썼지만 나에게 그런 보람이 있는 것일까. 일찍도 생각해 본다. 그동안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거기에다 무슨 얘기를 한 것일까. 땅은 소유의 욕망이고 흙은 땀의 의지라는 둥 개념만 늘어놓은 것 같다. 보릿고개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듯이 아리랑 가락을 들으면 웬지 눈물이 나고 그리워지듯이 진정한 의미의 흙은 눈물의 테마이고 아픔과 그리움의 테마이다. 흙의 소리는 어린 시절 보리피리 곡조처럼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 소리처럼 아련한 그리움이다. 악성 난계蘭溪 박연朴堧 선생의 고을에 살며 도리천 선법당에나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큰 천고天鼓의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 선비의 삶과 일과 꿈, 영동 아리랑고개 기억의 저편 흔적들을 톺아보며 역사에 되묻고자 한다. 그 때 왜 그랬는가. 시골 농촌 마을 사람들 얘기로 쓰려는 것이다. 내레이터는 전지적 3인칭 시점, 필자를 닮은 기자, 무명 시인이다.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청탁한 (주)국악신문사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열정을 쏟아 보답하려 한다. 전국의 독자 여러분, 세계 여러 네티즌들의 질정을 바란다. 이동희의 연재소설 '흙의 소리' http://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me_id=90&me_code=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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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강덕이 할머니가 부른 '밀양아리랑'2023년 9월 11일부터 13일 사이, 한국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金練甲) 이사장과 대종교 원로 리창구(李昌九)께서 연변에 와서 나(리광평)를 찾았다. 김연갑께서는 이미 몇해 전에 두번이나 연변에 다녀와 연변음악가협회의 도움과 나의 도움으로 조선족의 유명한 음악가들이고 음악교육자들인 전화자(全花子), 안계린(安继麟), 김봉관(金凤官)등을 만나 중국조선족음악, 특히는 연변에서의 아리랑에 관한 연구성과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였었다. 특히는 2013년 7월 21-22일에 오셨을 때는 1급 작곡가 안계린의 '장백산아리랑'에 관한 자료와 김봉관이 수집정리한 연변에서 불려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등 자료들을 수집한 후 한국에 돌아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아리랑 음악에 대한 성과들을 전세계에 널리 홍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때 영화 ‘아리랑’ 연구가 기미양과 함께 오셨을 때도 나의 안내로 이곳 룡정시 지신진 명동학교의 졸업생이고 1926년 한국에서 처녀작 "아리랑” 을 발표하고 그후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소문난 라운규(罗云奎)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유서 깊은 룡정의 몇 곳을 답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라운규가 조선 회령의 기차역 로동자들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일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리랑' 창작에 몸을 바쳤다고 하던 저 두만강 건너 회령 기차역을 룡정시 삽합진 망강각에 올라 바라보았고, 또 명동학교 전시관에서 라운규를 소개한 전시품들을 살펴보았으며, 라운규네가 올랐던 선바위, 그리고 지난 세기 3,40년대에 아리랑극과 노래가 공연되였다던 룡정 성세극장 옛터도 답사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그는 10년만에 다시 연변에 왔다. 그런데 그때 만났던 안계린과 감봉호 음악가들이 이미 저 세상사람이 되였고 전화자 선생님도 외출한 상황이라 이전에 련락하였던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였단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아직 건강하게 활약하고 있기에 이번 걸음은 전부 나에 의거한다는 것이였다. 세월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쩔수 없으니깐 오직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봐야 하겠다. 나는 김연갑선생님과의 전화통화에 의해 연길시 연서가 35호에 자리잡은 한정호텔(汉庭酒店) 403실에 그들의 숙박을 잡아주었고, 11일 오후 2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4시 반에야 입국수속을 마치고 출구로 나온 김연갑과 리창구를 반갑게 맞을 수 있었다. 호텔 수속을 마치자 김연갑은 전화자 선생님이 출국하였기에 만날 수 없고 안계린과 김봉관도 사망하셨기에 만날수 없어 몹시 서글프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번 걸음에 연변조선족음악 더욱히는 아리랑 노래에 대한 연변의 연구성과들을 료해하고 이전에 연변에서 밀양아리랑이 불러졌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나한테 무슨 수가 없겠는가고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연변문련원 부주석이였고 조선족음악가이며 중국조선족명인관 관장인 류영근(柳永根)한테 전화를 걸어 김연갑이 왔다고 알려주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시킬 수 없겠는가고 청을 하였다. 언녕부터 김연갑에 대해 알고 있는 류영근은 이는 우리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홍보하는 좋은 기회라면서 래일 오전 10시에 연변대학 맞은켠 대학성1호 건물 8층 연변미술관 옆에 있는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찾아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이 기쁜 소식을 김연갑한테 전하자 그들은 너무 흥분되여 어쩔바를 몰라 하였다. 그러자 나는 지금의 안도현 명월진에 1938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집단이민을 오셨던 강덕이란 할머니가 계신데 그를 만나면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걸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김연갑은 래일 오전에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한 다음 즉각 안도현 명월구로 가서 강덕이할머님을 만나보자고 하였다. 김연갑은 그렇게 되면 이번 걸음의 목적을 이룰수 있을 것 같다며 나한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올렸다. 나는 밤이 깊어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9월 12일 내가 택시를 타고 오전 9시 10분에 한정호텔에 도착하니 그들은 언녕 1층 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안도현 명월진의 강덕이할머니에게 저들이 오늘 오후에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하였다. 그러자 강덕이는 지금 자기는 허리가 아프면서 걷기가 힘들어 안도현중의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오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는 것이였다. 9시 40분이 되자 우리는 걸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에 도착하였다. 중국조선족명인관 녀성관장이 저들을 반기면서 류관장께서 손님을 접대하다보니 약 반 시간 후에 오실거라면서 김연갑과 리창구한테 전시품들을 까근히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명인관에는 현재 연변조선족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허세록, 그리고 김성민, 정진옥, 박우, 동희철, 김남호, 허원식, 방룡철, 안계린, 안국민, 최연숙, 최삼명, 김봉호, 최창규, 김봉관, 박서성 등 16명의 연변조선족음악가의 사적들과 음악작품들, 그들을 소개하는 책들과 CD, 메달과 증서, 그들이 사용하던 악기, 실물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류영근께서 오시더니 김연갑 등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시고 오신 것을 환영한다면서 16명 연변음악가들의 사적을 상세히 소개하여 주었다. 김연갑 선생은 이전에 자기는 여러 차례 연변에 다녀와 조선족음악에 대한 조사를 하였었는데, 그때는 이런 전시관이 없어 모진 애를 먹었단다. 그런데 오늘 이런 현대적인 전시관을 보니 몹시 격동된다면서 연변문화의 발전 성과를 만끽하게 되고 조선족 음악에 대한 깊이와 수준을 형상적이고도 예술적으로 실감하게 된다고 탄복을 금할줄 몰랐다. 특히 이 명인관에서 듣는 조선족음악은 이전에 자기들이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워 중국조선족음악에 대한 애착심이 더 생기고 또 리해를 더 깊이있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관람과 소개가 끝내자 류관장은 우리 일행를 데리고 동영상실에서 중국조선족명인관소개, 연변음악가소개에 관한 동영상들을 관람시켰다. 그러면서 류영근은 앞으로 여러 가지 도경을 거쳐 김연갑 선생에게 이런 자료들을 제공하여 주고 여러 면으로 교류를 하며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기에 힘쓰겠다고 말씀드렸다. 김연갑 선생은 류영근관장의 접대와 소개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와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 전세계에 중국조선족음악을 잘 홍보하기에 최선을 다 하며 앞으로 많은 교류와 협작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였다. 류영근 관장은 우리들에게 오찬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자신의 승용차로 우리들을 연길기차역 광장 장거리 뻐스역까지 모셔가서 안도로 갈수 있도록 편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나는 김연갑 선생, 리창구 선생과 함께 연길에서 안도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떠나 오후 2시 10분에 안도현 명월진에 도착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안도현중의병원 409호 병실로 찾아가 강덕이 할머님을 만나게 되였다. 허리 통증으로 인하여 걷기가 힘들어 입원치료를 받는다는 강덕이 할머님은 몹시 허약해 보였다. 아래에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이 강덕이 할머니와의 인터뷰 내용을 록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김연갑: 할머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고향엔 다녀가셨어요? 강덕이:우리 부모네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1938년도에 이곳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오늘의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에 집단이주를 왔댔어요. 나는 그 이듬해인 1939년에 도안구 집단이주민 부락에서 태여났지요. 약 10년전에 우리 부부는 한국의 고향에 한번 놀러갔댔어요. 고향집이 있는 데로 가니까 우리 옛 집터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옛집은 이미 허물어졌더군요. 그래서 왜 집을 허물었는가고 물으니 새로운 주인이 이사를 오면서 그 집에 사람들이 들지 않으니 허물고 그 자리에 콩크리트 바닥을 하여 마당으로 쓰고 있다고 합데다. 그리고 바닥 옆에 창고를 짓고 거기에 우리 부모네가 쓰던 디딜방아랑 가대기랑과 낡은 가구들도 진렬하고 있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는 어릴 때 사셨던 집터 기억이 나세요? 강덕이: 나는 중국에서 태여났으니 나의 엄마의 말을 자꾸 들어 조끔 알고 있었지요. 나의 엄마는 우리집 대문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는데 아이들이 채 익지 않은 대추를 따 먹는다고 야단을 쳤댔다고 말하셨지요. 그래 가보니 정말 그 대추나무 한그루가 그냥 있더군요. 나의 할아버와 할머니께서 일찍 사망하시다보니, 고모는 우리 아버지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고달프게 살았대요. 우리 고모가 아버지를 키우셨대요. 그때는 장가를 가려면 밑며느리를 집에다 데려다 놓고 키워서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15살인 우리 엄마를 집으로 데려왔대요. 그래서 고모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키워서 나이가 되니까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고모네가 중국에 이주를 가게 되였대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두고는 갈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우리 고모는 아버지네를 데리고 중국에 집단이주를 오게 되었대요. 그때 고모는 중국으로 가려면 꼭 된장과 간장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더러 도가지에 된장과 간장을 각각 담아서 중국에 가져오게 했대요. 지금 그 도가지를 내가 보존하고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집단이주를 왔단 증거물이 아니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고향에 있으면서 삼을 심어서 실을 내여 삼베를 짜서 집식구들의 옷을 해 입혔대요. 중국에 와서도 삼베를 짜야 옷을 지어입을 수 밖에 없으니 계속 삼을 심고 그걸 실로 내여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짰어요. 나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베를 짜는걸 도와서 실을 비비기도 하고 감기도 하였지요. 리광평: 이 분은 그때 부모님들이 가지고 왔던 독을 보관하고 있을뿐아니라 어머니께서 짜셨던 베천 쪼각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외 여러 가지 물건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강덕이: 그때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천으로 짜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가 짠 베천으로 콩물을 짜는 주머니를 만들었지요. 지금 그 주머니를 보관하고 있어요. 김연갑: 참, 그 베천쪼각이라도 가지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리광평: 그때 저 할머니께서 그 베천쪼각을 저한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저도 가지고 싶지만은 이 천을 고이 잘 간직하였다가 이 마을 신툰촌력사전시관을 꾸릴때 전시하여야 제일 값이 있을거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연갑: 그리고 할머니, 이전에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찾아와서 이런저런 조사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지 않았어요? 강덕이: 그때 많이 왔지요. 한국에서도 오고 중국의 북경, 장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왔댔어요. 그때 우리 마을은 전 연변에서 제일 처음 명명된 조선족민속마을이였거든요. 한번은 북경에서 온 도연(导演)이 우리 민속촌에 대한 촬영을 아주 상세하게 하였어요. 그러면서 아주 훌륭한 동영상을 만들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도연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그만 차에서 중풍을 맞아 사망하였대요. 하여 그 좋은 자료들이 몽땅 없어지고 동영상도 만들지 못했거든요. 얼마나 아쉽던지! 지금은 년세 많은 분들이 다 사망되고 집단이주력사 이야기를 할만한 사람들이 없어요. 이젠 나 혼자만 남았어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도 그때에 노래랑 많이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이고 정말 많이 불렀댔어요. 김연갑: 그러면 아리랑도 불렀고 밀양아리랑도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리랑이야 제일 많이 불렀댔지요. 밀양아리랑도 그렇고. 밀양군과 합천군이 서로 있대여 있고 또 집단이주도 함께 왔으니 고향에서 있을 때도 그렇고 또 이곳에 와서도 그렇고 밀양아리랑을 많이 불렀댔어요. 리광평: 할머니, 그럼 저하고 함께 밀양아리랑을 불러 봅시다. 강덕이와 리광평이 밀양아리랑을 부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강덕이: 야, 이 노래를 많이 불렀댔어요. 그런데 내가 부르는 밀양아리랑은 방금 부른 것보다 가사 틀려요. 이 가사는 고모님과 어머니가 많이 부르던 가사래요. 그래서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지요. 김연갑: 그러면 이곳에서 해방이 나기전부터 밀양아리랑을 불렀단 말씀이군요. 강덕이: 그거야 당연하지요. 해방전부터 불렀다니깐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님의 부모님들이 부르던 노래가사대로 불러 보세요. 강덕이: 그러면 부를게요. "이것 보소, 저것 보소 뭘 보란 말이요 신작로 복판의 대갈보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김연갑: 이 가사는 제가 한국에서나 밀양에서 들어본적이 없는 독특한 가사입니다. 이건 이곳에서만 불러진 가사입니다. 리광평: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별미입니다. 김연갑: 할머니께서 노래도 잘 부르시고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젊었을 때는 명창이였겠습니다. 이전에 이 노래를 록음한 적이 있어요? 강덕이: 그때 어디에 록음기가 있었겠어요? 김연갑: 아니 이 마을로 취재를 왔던 사람들이 록음하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강덕이: 이 노래가사로 된건 록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입니다. 리광평: 2018년 한국 대구의 EBS방속국의 국장 김영봉이란 PD가 강덕이와 권유세가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비디오촬영을 하였댔습니다. 김연갑: 아이참, 정말로 소중한 이야기를 하셨고 뜻 깊은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밀양아리랑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불러졌다는 유력한 증거로 됩니다. 밀양아리랑을 이곳에서 불렀다는 생동한 증거물을 찾게되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는 우리 예상밖의 성과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리광평: 저는 이 할머니를 1988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줄곧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할머님은 제가 만나서부터 농악대에 들어서 북을 치거나 장고를 치는걸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잘 불렀답니다. 김연갑: 할아버지도 이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까? 강덕이: 나의 령감은 춤을 추거나 악기를 다루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생산대에서 늘 회계사업을 하니깐 그런 일을 할 여가가 없었어요. 하지만 노래는 참 잘 불렀어요. 정말로 아까운 분이였어요. 십여년간 생산대 회계를 하였지요. 회계를 잘하여 상장도 탄 것이 있었는데 어디에 들어갔는지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리광평: 제가 이들 부부한테 여러번 권고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기나 자기집에서 겪어왔던 실제적인 일들을, 가정에 생겼던 일들을 글로 적어서 이 세상에 남겨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2018년에 이분의 남편 권유세께서 친히 반년동안의 정력을 들여 1만2천여 글자나 되는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 력사재료 참고서》를 친히 썼댔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꼭 잡고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리관장, 내가 리관장의 부탁대로 없는 재간이지만 이 신툰촌력사재료 참고서를 썼소. 그러니 리관장께서 보시고 다시 수개도 하고 보충도 하여 앞으로 책에 실리도록 하여주오. 이것이 나의 최후의 소망이요. 꼭 부탁드리요.”라고 하셨댔습니다. 하여 나는 그 글을 본 다음 수개도 하였고 원본을 돌려준 다음 더 내용들을 보충하라고 맡겼댔습니다. 그러자 권로인은 다시 다른 책에 옮겨 뻬끼면서 또 다른 내용도 보충하였습니다. 나는 그걸 다시 수정하고 타자를 하여 로인님들께 드렸습니다. 지금 그 내용과 원본들을 제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이 출판될 때 꼭 이 글을 넣으려고 합니다. 김연갑: 그 원본과 글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구요? 참 의미있는 큰일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력사증거물로 될 겁니다. 정말로 소중한 기록들입니다. 할머니께서 글을 쓸수 있어요? 강덕이: 쓸수 있어요. 한자든 조선글이든 다 쓸수 있습니다. 김연갑: 이 노트에 할머님의 이름과 주소, 방금 부른 밀양아리랑노래의 가사를 적어주세요. 강덕이: (글을 쓰신다.) 아이고, 이젠 손도 말을 잘 안들어요! 김연갑: 그 정도면 대단한거지요. 년세가 85세인데요. 확실히 이곳에서 밀양아리랑을 불렀댔군요. 그리고 할머님 신분증도 촬영합시다. (강덕이께서 신분증을 내놓자 내가 사진기로 복사하였고 할머니께서 쓴 글도 사진기로 복사하였다.) 김연갑: 할머님의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대갈보, 대갈보란 무슨 뜻인가요? 강덕이: 대갈보? 우리는 뚱뚱한 사람들을 대갈보라고 합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께서 병원에 얼마 동안 계셔야 된대요? 강덕이: 지금은 한 단락치료기간이랍니다. 치료를 해보고 만약 났지 않으면 다음 치료계단으로 넘어간답니다. 오늘까지 사흘간 치료를 하였는데 좀 나은것 같기도 합니다. 김연갑: 건강하시여서 리광평선생님한테 이야기를 다 하시십시요. 그러면 그걸 연변이나 한국 합천군과 밀양군에도 다 알려지게 될겁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이 나면 전화를 통해서라도 수시로 이야기해 주세요. 강덕이: 리선생님이 물어보면 제가 대답할수 있어요. 김연갑: 리선생님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리광평: 최근에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PD와 합작하여 이들 부부가 2018년 8월에 결혼 60주년 기념행사인 회혼례를 치르던 장면들로 조선족민속전문프로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연갑: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시고 있네요. 할머니께서 건강하셔서 리선생님한테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세요. 강덕이: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반가운 귀빈들에게 때시걱이라도 끓여줄 텐데 참 미안합니다. 더욱이 병원까지 찾아와 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네, 부탁대로 할게요. 김연갑: 건강하십시요. 다음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올게요. 치료를 잘 받으세요. 뜨거운 악수를 나누면서 우리들은 아쉬운대로 석별의 인사를 올렸다. 병원에서 나오니 오후 세시 반이 가까워졌다. 하여 우리는 택시를 타고 명원구 시내의 길가에 펼쳐져 있는 장마당으로 다녀갔다. 거기서 송이버섯 3송이와 땅콩, 해바라기씨, 수박 등을 샀다. 그리고 명월구 공공버스역에 다녀가 공공버스를 타고 연길에 돌아왔다. 연길기차역에 다녀가 물어보니 이젠 이곳에선 려객기차를 탈수 없으니 연길서역 고속철도역에 가야 한단다. 하여 우리는 16선 공공버스를 타고 직접 연길서역에 이르러 13일 오전 8시 19분 연길—단동 고속렬차 표를 샀다. 호텔부근 부산돌솥밥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 8시 반이 되였다. 나는 래일 아침 7시에 연길서역에서 그들을 만나 이틀간에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메모리에 담아 드리고 또 나의 선물로 참깨를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6시 반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김연갑선생측도 7시 10분이 되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약속대로 그동안 답사 사진을 찍은 메모리와 참깨를 드렸다. 단동행 고속렬차 출발시간이 오라지 않기에 그들은 다투어 검표를 마치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나는 16선 버스를 타고 아리랑축구공원 북측역에서 내려 '연길아리랑축구공원' 간판들과 공원 모습들, 신체단련을 하는 사람들을 명심하여 기록하였다. 이 사진은 메일로 김연갑선생님한테 보내드릴 준비를 마치였다. 나는 다시 16선 버스를 타고 연길 모아산에 도착하였다가 룡정버스를 타고 룡정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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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드 아리랑고개’를 수록한 ‘회계와 세무’ 창간호작품 ‘아리랑고개’ 여체의 곡선미를 ‘아리랑고개’로 표현했다. ‘아리랑고개’의 의미가 사진작가에게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해석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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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날,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을 보다광복절날 오후 4시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하여 사할린 섬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이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를 찾아갔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1938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만 명의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시켰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두고 온 자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저 언덕에 올라 바다를 향해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온 동네에 퍼져 이불 안에서 다들 울었다우.” 라고 증언한 코르사코프 바자르 할머니의 증언이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젠 대부분 강제동원을 당한 사할린 동포 1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묻혀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뒤늦게 알려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도 역시 그 실체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전시를 보기 위해 힘겹게 전시장을 올라가니, 이미 ‘작가와의 만남’은 진행되고 있었다. 막 들어서니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가 축사를 하고, 경상도에서 온 지역 소리꾼이 부를 사할린아리랑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구미와 대구에서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이었다.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내가 여기 왜 왔나.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놈들 무서워 따라왔지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 왔던가 우리집 영감님은 왜 가셨나 나만 혼자두고 어데를 가셨나” 전시장에는 소련 시절부터 한민족 풍습을 지켜 온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예식 기자를 비롯하여 전시를 준비한 ‘Kin지구촌동포연대’ 최상구 대표와 사진가 김지연씨,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기미양 (주) 국악신문 대표이사,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 새롬출판 송남숙 대표가 자리를 채워주었다. 특히나 인천, 서천, 안산, 파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대표,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정영신, 곽명우씨 등 70여 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작가 이예식씨는 1949년 사할린 마카롭시에서 출생하여, 1998년부터 지금까지 ‘새고려신문’ 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할린1세였던 부친의 애환을 바라보며 성장한 2세로서 꾸준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예식 작가는 인사말에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먼 길로 우회하여 왔다”는 말로 한국과 러시아 교류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진작가 김지연씨는 "시대를 증언하는 이미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며 "광복절을 맞았지반 사할린 동포는 진정 해방이 되었는지 묻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사할린의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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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70주년&정전70주년 기념,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 팡파레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유엔 참전용사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6‧25한국전쟁에서 나누었던 동지애 및 인류애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는 국적이 다른 22개 유엔군 참전 용사들이 모였지만, 아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역시 참전 용사와 유엔 합창단이 함께 부른 ‘어메이징 아리랑’이었다. 무대 영상에선 각국 참전 용사들이 6‧25전쟁 때 불렀던 아리랑을 추억하며 한 소절씩 부르는 모습이 나왔다. 이날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에서도 한미동맹70주년 및 정전협정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이 메아리쳤다. 27일 동두천시가 주최하고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가 주관한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는 한·미우호관계 발전과 나아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아리랑에 담아냈다. 10시 현충탑과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단장:김경수),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유은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이 함께하고, (사)아리랑연합회와 (주)국악신문이 후원했다. 김경수 지부장의 사회를 맡고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의 초혼무 '살풀이춤', 가야금병창 '아리랑',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의 '지신밟기'와 '비나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이담아라리', '동두천아리랑', '황석산아리랑',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아리랑'이 불려졌다. 오전 10시 동두천 현충탑앞에서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동두천평화아리랑제추진단 창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다음은 선언문 중 한국전쟁 때 남북이 양측에서 각각 불렀던 아리랑이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정선아리랑' 1절)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 '음탄(音彈)아리랑' 1절) 백두산봉우리 깃발 펄펄 날리고 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빨지산아리랑' 1절,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 )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는 식전행사에서 한국전쟁시 세계평화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 및 순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념제를 올리고, 지신밟기로 시작하여 '아리랑'을 헌정했다. 주최측은 "한미동맹 70주년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미우정을 상징하는 아리랑을 통해 더욱 한미우정을 강화하고,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의 정화와 치유를 회복하는 정주년이 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김경수 회장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으로 이 땅을 정화시키고 '동두천시를 새롭게, '시민을 힘나게', 회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동두천'의 서사를 주제로 한 지속적인 전통문화 활동을 통해 동두천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효과를 기대한다. 특히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전쟁에 참가한 22개국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호국영령들에게 아리랑을 바친다"라고 밝혔다. 또한 내년 2회에는 경기 북부 지역의 민·관·군과 다문화사회를 대상으로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문화예술 향유 기회의 장을 확대·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히겠다고 전했다. 유은서 회장은 "전국적 물난리로 행사가 축소된 이번 동두천평화아리랑제이지만, 우리 전 회원은 한마음을 모아 유엔 참전용사들과 순국선열들을 추념하며, 평화의 노래 '동두천아리랑'이 시민들에게 애창곡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혜솔 회장은 "동두천에 주둔한 미 7사단가로 불린 아리랑을 부르면서 감회가 새롭다. 미군들이 널리 알린 이 아리랑이 미국 뮤직션들이 편곡하여 여러 버젼의 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정전 70주년이라는 정주년을 통해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담보하는 동두천의 서사는 '상생의 도시 동두천'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상생의 도시 동두천은 세계 유네스코가 주목한 아리랑의 3대정신(대동 해원 상생)을 구현할 수 있는 중추적 역활을 수행할 수 있는 서사를 담보하고 있다. 동두천 보산리에 주둔한 미군 7사단이 매일 아침마다 불렀던 단가 '아리랑', 1964년 안흥리에 미군 7사단이 지어준 '아리랑다리', 미군 위안부 모임 '아리랑'은 동두천 시의 역사이고 서사이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충돌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요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산리에 1971년까지 2만6천명이 주둔한 미군들이 단가로 아리랑을 불렀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들에게 아리랑악보가 담긴 실크 스카프를 고국으로 보냈다. 어제 국가보훈부에서 이 '아리랑스카프'를 복원하여 유엔 참전용사들에게 선물을 한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전장에서뿐 아니라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식을 마치고 귀환하던 유엔대표단과 북한 측이 사열할 때도 동시에 각각 연주된 곡이다. 이날 동두천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여 아리랑이 불러진 것은 역사적 의미를 시사한다. 아리랑은 미래의 노래이고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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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국전쟁과 아리랑(中)전쟁과 같은 극단적 위기의 순간은 인간 본성의 밑바닥과 고귀함을 치열하게 발현하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갖가지 선언문과 격문으로 표출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함성과 노래로 나타난다. 곧 35년 간의 압박에서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공간과 그 3년 후에 맞은 한국전쟁기가 그것이니, 시민들은 아리랑으로 그 격정을 표출하였다. 오랜 세월 불러오는 아리랑은 저항성과 대동성과 상생정신이 담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뉴욕에서 발행한 한국 안내서 ‘THE KOREANS AND THEIR CULTURE’에는 아리랑을 "··· one of the most famous of all Korean songs"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고 있었다. 이는 다음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통신’ 1946년 7월 25일 자 ‘아리랑 곡이 미국에 대유행’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근착(近着) 미국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목하 미국의 경음악계엔 난데없이 ‘아리랑’이라는 애틋한 동양정서의 신곡이 급작스럽게 유행하고 있는데, 거리나 사교실에서 이 노래의 다정다한한 멜로디는 모든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너도 나도 창화(唱和)하는 지경이라고 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명한 흑인재즈밴드 B.C.B의 뉴욕 연주엔 이 노래가 가장 인기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리랑’이 틀림이 없는데 바다 건너 몇 만 리 미국 본토엔 그동안 조선 38선 이남에 주둔하였다가 제대 귀국한 병사들이 돌아와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조미(朝美)문화 교류의 선봉을 차지하게 된 터이라 한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일부이지만 아리랑을 알고 오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집입 하기 전 일본 오키나와(沖縄県)기지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리랑 익히게 되었다. 일부 간부에게 한정된 과정이기는 하지만 포로 관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을 구부하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게 하여 부르지 못하거나 서툴게 부르면 중국군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반 병사들은 참전 중 통역 등 한국군에 의해 알게 되거나 위문공연 등의 기회를 통해 알게 된다. 한국전쟁기 미 제3사단 15 연대 정찰소대 통역병이었던 전 경안서점 주인 김시한 사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서로 친해졌다. 언어소통도 어느 정도 해결되니 자연히 서로 대화가 쉬워졌다. 한 친구는 나에게 군에 오기 전 무얼 했느냐고 물어서 티쳐(Teacher)라고 했더니 무엇을 가르쳤냐고 물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특히 음악을 많이 가르쳤다'라고 했더니 한국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애국가를 가르쳐 봤더니 어렵다고 해서 아리랑을 불렀더니 아주 흥미를 가지고 따라 부르더니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부르며 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리랑만 부르면 흥겨워했다. 그리스 군인도 우리와 같이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도 아리랑을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불렀다."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 영화 '전송가'(Battle Hymn)의 내용이다. 1957년 개봉된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하여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6.25 참전 실화를 다룬 것이다. 고아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인상 깊게 인식한 결과로 아리랑을 주제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아리랑 사연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퍼센트이다. 아리랑을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된 사례인데,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활용 된 것이니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기사에는 '음탄(音彈)'말이 나온다.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 보인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이 기사에 대해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북한 측에도 적용된 듯하다. 중국이 1953년 발행한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에 실린 중국군 군가 중 '빨지산아리랑'이 있어 확인된다. 이 군가는 밀양아리랑 곡조에 이러한 가사로 되어있다.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전쟁으로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 한편에서는 무기가 된 것이니 아픈 아리랑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아픔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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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아리랑제 확장성 확인, 제9회 경산아리랑제2007년부터 이어 온 경산아리랑제, 지난 24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남매지 공원 특설무대에서 진행되어 시민의 큰 환호를 받았다. 특히 메인 행사인 ‘fail in love 경산 & 아리랑’에 반응이 컸는데, 구성이 다채로운데다, 출연자들의 기량이 높았다. 특히 경산아리랑보존회의 ‘나무하는 소리’와 ‘지게목발 소리’가 작품성이 매우 높았다. 방아타령 "에헤루야 방아야/에헤루야 방아로다 어절사콩콩 찧는 방아/언제나 다 찧고 마실갈꼬 (후렴) 이 방아야 독도구방아야/저 방아야 나무도구방아 나무절구 주걱소리/알각달각 장단치면 시어머니 잔소리방아/며느리는 눈치방아로다" 맷돌질 소리 "맷돌아 돌아라 빨리빨리 돌아라 얼른얼른 해놓고서 얼른얼른 해놓고서 다른일도 해야되지 다른일도 해야되지 고달프고 힘겹지만 고달프고 힘겹지만 어서 두부를 만들자 어서두부를 만들자 돌아돌아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빨리돌아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 콩을 돌아서 동생을 줘 맷돌 맷돌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콩을 돌아서 시누이줘 맷돌 맷돌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지난해 자인 숲에서 개최된 제8회 경산아리랑제는 경연대회와 본 공연의 장소가 각기 달라 혼선을 빗기도 했는데, 이번에 남매지 공연으로 장소를 옮겨 주제 공연으로 유도하는 집중력이 높았다. 장소를 옮기면서 청중의 눈과 귀를 무대로 향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제7회 경산아리랑가창대회’는 예선에 통과 된 15팀 중 영상 심사 결과 6팀이 결선에 올라 현장에서 경연을 벌였다. 참가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전국의 국악인들에게 경산아리랑을 알리는 효과는 거두었다고 본다. 이어진 '전국학생 겨레노래 아리랑 부르기 대회’도 예선은 영상심사인데 ,3명 이상이 참가하는 팀만이 출전할 수 있다. 예선에서 선정된 최종 6팀(서울, 경기, 대구, 경북 등)이 무대에서 경연을 벌였다. 학생 대상은 첫 시행인데다 3명 이상의 팀제로 참가 자격을 두어 참가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내년에는 홍보에 더 힘써야 할 듯하다. 대상에는 '사할린아리랑'을 부른 사할린 4세 학생들팀이 수상을 했다. 세 번째 행사가 흥미로웠다. ‘경산 &아리랑 박사 이벤트’로 아리랑과 경산아리랑의 이해를 넓히려는 의도로 처음 마련된 행사인데, 전국에서 첫 시행이었다. 문제 범위를 행사장에 비치된 홍보물 내용을 퀴즈화 한 것으로 아리랑의 위상(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지정 등), 경산아리랑의 이해(언제부터 불렸는가, 축제는 몇 회인가?), 경산시의 이해(시화, 시조 등 상징 문제), 경산 지역 축제(경산대추축제, 단오제, 갓바위축제 등) 15항을 제시 채점자 순위로 선정했다. 시민 참여형의 신선한 소재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 다양한 이벤트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동시 진행 되었다. 앞으로 고정된 장소, 고정된 날로 특정되면 독립 주제 축제로의 입지가 확립될 것으로 확인 되었다. 사라져 가는 영남에서 전래되는 방아타령, 맷돌질소리,나물노래, 나무하러가는소리, 지게목발소리, 댕기노래, 물레소리, 어부사,밭매는소리, 상여소리, 화전노래, 지점소리, 칭칭이소리를 한자리에서 전통의 실생활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퍼포먼스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 전래민요를 배치하고, 경산아리랑을 셔플댄스에 담아 조선팝으로 특화 시킨 기획의도가 제대로 관객들의 가슴에 전달되었다. 인사말에서 배경숙 대표는 "매년 6월 24일 하루는 남매지 공원 ‘경산아리랑의 잔치날’로 확정되어 경산만의 축제를 펼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연갑 이사장은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와 함께 한 축사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한 경산아리랑은 8회까지는 배경숙 이사장의 열정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이제 남매지 공원에 자리 잡은 내년 10회부터는 경산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 휘날레를 경산아리랑을 조선팝(K-Pop) 장르로 확산 시킨 기획 의도는 대성공이라고 본다. 지난해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은 장르이다. 소리를 기본으로 춤과 연기력까지 더해진 무대는 10분 짜리 뮤직컬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성공적 공연의 첫번째는 보존회 회원들의 기량이 남다르게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20여 년 보존회 결성 이후부터 가족처럼 모두 함께 해온 성과라고 본다. 휘날레가 끝나자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쳤다. 아리랑 후렴을 따라 부르면서 흥얼거리면서 아쉬워했다. 경산아리랑 가사와 로고가 박힌 부채와 수건을 받아서 펴보면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하면서 어깨를 들썩들썩거리면서 돌아갔다..... 경산아리랑 "남매지 얽힌 전설 오누이 눈물인가 남성현 높은 고개 보슬비가 흩날리네 남천강 푸른 물결 말없이 흘러가고 나그네 잠긴 설움 옛 추억도 떠-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네" 경산아리랑이 내내 입속에 맴돈다. 한편 경산의 명물 '남매지'는 경상북도 경산 시내에 자리한 저수지이다. 남매지라는 이름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조선시대 때 부모를 잃은 가난한 오누이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오빠가 한양으로 떠난 사이 여동생은 심보 고약한 빚쟁이의 첩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여동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졌고, 이 소식을 들은 오빠도 함께 자결하면서 이들 오누이가 목숨을 잃은 저수지 이름이 '남매지'가 되었다고 한다. 비극적인 전설과 달리 지금의 남매지는 경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자 도심 야경 명소로 사랑받는 데이트 코스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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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경새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의 만남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주말 11일 문경 시민들이 사할린동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양주를 찾아갔다. '아리랑도시 문경’을 알리고‘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를 위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 이만유)’가 주관, 개최한 올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열렸다. 아도위 회원 34명이 이른 아침 문경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이렇게 먼 곳 양주를 찾아간 연유는, 2014년 사할린 귀국 동포 101명(현재 95명)이 양주시에 새 둥지를 틀어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고, 문경새재아리랑의 확산을 위함이었다. 율정마을 ‘양주시 사할린동포회(회장 : 김정희)’와는 이미 몇 차례 우리와 만난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2018년‘디아스포라 아리랑제’가 열렸을 때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서 아도위가 주관한 고유제를 함께 지냈던 적이 있어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도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와 러일중 동포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했다. 이 당시 이 분들도 함께 무대에서, 광장에서 만났다. 당시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이름으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양주시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직전 회장, '카레이스키아리랑'(카레이스키는 러시아어로 ‘고려인’을 의미)을 창작하신 김세르게이 작곡가,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최나타샤(최미분)단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 의정부 전호열 아리랑 애호가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시고 축사 및 격려사를 해 주셨다. 먼저 이만유 위원장이, 오늘 ‘양주시 사할린동포회’를 찾아와 여러분과 함께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열게 되어 반갑고, 이 만남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며,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이 역사가 오래되어‘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하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아리랑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순수 민간인들이 뭉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시키기 위해, 지난 2017년 아도위를 창립, 아리랑학교 등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근래 인지도가 높아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을 주목하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편곡하고, 여러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 모쪼록, 오늘 아리랑학교가 끝날 때까지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부른 노래가 아리랑이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이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창작 발표하여 아리랑으로 코로나를 물리치자는 노래를 널리 알렸다"고 격려해 주었다. 직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으며, 오늘 이렇게 사할린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아도위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은 "지금까지 양주사할린동포회와 문경시민들과는 7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신 아도위에 감사한다"고 하였으며,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리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감사장을 수여했다. 아도위가 받은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어서 신현국 문경시장(함광식 문화관광농업국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 ‘문경새재아리랑 소리꾼 송영철과 만남’과 문경오미자 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위원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이날 아도위 황동철 이사의 사회로 시작한 아리랑학교는 식전행사로 ‘한두리국악단(단장:함수호)’의 여는 마당, 사물과 태평소(함수호: 쇠, 유대상: 설장고, 김원섭: 북, 이성자: 징, 김경숙: 태평소)의 풍물 공연으로 이날의 행사를 축하했다. 이어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 최미분) 20명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어서 한두리국악단 반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합창단(단장:박순자)의 ‘아리랑연곡(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축하 공연이 있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아도위 창작곡인 이만유 작사 함수호 작곡의 ‘코로나아리랑’과 권순애 작사 함수호 작곡 ‘풍년아리랑’공연이 있었으며,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이고,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이야기’란 주제로 이만유 위원장이의 특강으로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아리랑의 기원과 유래, 어원은 무엇일까?, ‘문경새재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사에서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내용이다. 이어서 이춘자・전정남・안복수 위원의 지도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으며, 안복수・이성자・김금옥 위원의 ‘다듬이 공연 및 체험’, 곽말득・신준식・조홍자 위원의 ‘하모니카 공연’, 가야금 함수호・해금 이기옥・장고 김경숙 국악인의 ‘가야금 합주’, 김영애・정행복 위원의 ‘신나는 가요 공연’, 정송위・김옥화(후) 위원의 ‘뱃노래’, 전정남・김옥화(선)・박춘자 위원의 ‘우리 비나리’, 사물놀이에는 쇠 함수호・설장구 유대상・북 김원섭・징 이성자, 태평소 김경숙의 멋진 공연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함께하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날 공연 총괄 지휘는 함수호 단장, 행사의 모든 기록(사진, 동영상)은 오석윤 감사가 수행하였다. 이상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아도위가 준비한 떡과 수박, 오미자 와인 등과 사할린 동포께서 직접 구운 러시아식 빵과 차를 들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 아도위 회원들은 대한민국 아리랑사에 또 하나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가슴 뿌듯하게 ‘아리랑도시 문경’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아니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그날까지 문경새재아리랑의 전도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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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 얼쑤!지난 11일 오후 2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사할린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문경시민 40여 명이 양주사할린동포회(회장:김정희)를 찾아서 아리랑으로 동포애를 나누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이만유, 아도위)가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일환으로 10년 전 사할린에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양주사할린동포회를 찾았다. 양주 사할린 동포들은 2018년부터 문경시민들과 문경(2번). 광화문광장, 사할린(3번), 정선 등에서 7번을 만났다. 특히 2018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 현지 사할린공연단(단장:이진선) 35여 명이 초청되었을 때, 당시 문경시민들과 문경새재에 올라서 '아리랑고유제'(제사장:이만유)에도 함께 참가했다. 당시 2018문경새재아리랑제 주제곡 '카레이스키 아리랑'의 작곡가 김세르게이 선생이 사는 곳이 양주 율정마을이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의 배우자이다. 지난날 문경시민들과 사할린 동포들의 만남을 헤아려볼 때 이번 행사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매년 양주 사할린 동포에게 문경사과를 보내주는 익명의 회원도 있다. 환영 축하 공연으로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미분 회장과 회원 20명이 사할린아리랑을 선사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 합창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기미양 국악신문 대표이사,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축사를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최근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의 초청으로 파주사할린동포회원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에서 개최한 '통일아리랑평화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불렀다는 노래가 아리랑이고,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 기록에도 서민과 왕이 같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처음 들어본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늘 부모님이 일하실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서 따라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사람들이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라고 소감과 함께 축사를 전했습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담론이 횡행하지만, 오늘 사할린 동포를 대표하는 권경석 회장에게 감사장을 받는 두 단체의 활발한 전승활동 사례를 들어 자랑 좀 하겠습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 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입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정선, 진도, 밀양에 이어 사할린을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실행을 못하고 해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하려고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창조성'을 주목하는 아리랑의 속성에 주목하여 왕십리아리랑을 창작. 보급에 성공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창작아리랑의 창출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어느 고을이든 공동체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할리아리랑보존회도 전승단체로서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건립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양주 사할린 동포는 해외 전승단체로 2018년 문경 디아스포라 아리랑 축제에서, 매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 지난해 12월 정선에 세운 유네스코아리랑비건립식에도 동행해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김세르게이 작곡가와 사할린아리랑보존회가 살고 계시는 양주 율정마을을 아리랑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 오늘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여러분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3년간 임기를 마치고 3개월 전 귀국한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넙죽 바닥에 엎드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 방식의 큰절을 올렸다.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모두가 갑자기 가슴이 울컥 숙원해졌다. 이어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그리운 동포들이 살고 있는 사할린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톡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만 올 수 있고, 부모가 사망하면 2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히나 전쟁으로 4년이나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문경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과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공로상을 수여했다. 아도위 이만유 위원장은 "오늘 행사는 우리 아도위가 '새로운 아리랑 역사를 쓴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대일항쟁기 이후 70여 년 동안 사할린에 억류된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니, 매년 문경새재아리랑제와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문경에 방문을 할 수 있는 방향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공로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혜솔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 이후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들과 힘이 닿는 날까지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전수교육,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에도 앞장 서겠습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신현국 문경시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시가 보낸 문경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과 문경오미자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회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식전 행사를 마치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이 환영사에서 "코로나가 오기 전 양주사할린동포회는 그동안 문경시민들과는 7번을 만났다. 2018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2019문경찻사발축제에 초청되어 2번이나 문경을 방문했고,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가 열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고윤환 문경시장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광화문 광장)에서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전승 단체들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오늘 이렇게 먼길을 찾아주신 문경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지난 2018년 12월 아리랑연합회에서 관광버스를 보내 주어서 우리 양주 사할린 동포들이 양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통일아리랑축제'에서 북한, 중국, 일본 동포들이 부르는 여러 아리랑을 처음 들었다. 이후 사할린합창단을 만들어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어서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제1부에서 아도위 문경시민들이 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이 이어서 연곡으로 소개되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함수호 단장이 작곡한 창작아리랑 풍년아리랑, 코로나아리랑을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힘차게 선보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였다. 이어서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이춘자, 전정남, 안복수 회원이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춘자 강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못하는 동포들이 금방 따라서 부르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문경아리랑을 배운 동포 중 이영헌씨는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나가보자고 하며 언제냐"고 물어본다. 문경아리랑을 따라서 부르면서 신명이 나서 어깨춤도 추었다. 한편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은 작년 대구아리랑경창대회에 동영상을 보내는 비대면 심사에 출전해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행사를 마치고 양주에서 직접 구운 빵과 차를 준비한 다과회에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문경에서는 떡과 수박, 문경오미자 와인을 준비해서 내놓았다. 오후 6시 아도위 회원들은 동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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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왕십리아리랑제, 제주아리랑부터 사할린아리랑까지지난 3일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주최주관하는 제13회 왕십리아리랑제가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6월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보훈 가족 50여 명과 성동구민 등 300여 명이 객석을 채워 성황리에 성료되었다. 45명이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1부 이산의 노래, 2부 해원의 노래, 3부 상생의 노래로 구성되어 7개 지역 아리랑과 경기민요, 전통춤으로 구성되었다. 특별출연으로 김명남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선사했다. '왕십리아리랑'은 순수 창작곡이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 이혜솔 명창이 작사하고,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작곡했다.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한양도성 동쪽 십리 응봉산 정기. 세세년년 우리 삶터 희망의 샘터. 살곶이벌 응봉기슭 응방의 옛터. 역사문화 오래오랜 우리의 터전. 인류유산 아리랑은 우리의 자랑. 슬기로운 매사냥도 인류유산이래요." 첫 막은 '왕십리아리랑으로 열었다. 1부에서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은 소극으로 엮어내어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하는 고난과 슬픔을 아리랑에 담아낸 이산의 아픔을 형상화 하였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 그 땅에 못가고 내 여기 사나 우리 영감님은 어데로 갔나 나만 혼자 두고 자기만 갔네 강제징용의 땅 사할린에서 한인 1세대들이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망향의 노래 ‘사할린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3연은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땅으로 이중징용 가는 대목이다. 우리님 따라서 사할린에 왔는데, 다시 나만 혼자 두고 일본 해저 탄광으로 끌려가는 이산의 고난을 고하고 있다. 2부 '해원의 노래'에서는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박옥희가 제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이때 제주해녀의 복장을 한 장경숙(제주아리랑연구회장)의 제주 해녀의 고난과 역경을 몸짓으로 표현하며 제주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내었다. 이어 김용자, 최순이, 박연춘이 상주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서 신명과 흥을 돋구웠다. 관객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면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굴리면서 추림새를 던져주었다. 얼쑤, 좋다! 3부 '상생의 노래'에서는 대일항쟁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호국선열을 추모하는 의미로 만든 '아무르아리랑'이 소극으로 펼쳐져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무르아리랑 넘어간다.(후렴) 원수하고는 같은 하늘아래 살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지니동양평화 대역사 시작되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아무르아리랑) 이 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2018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열리는 안둥근의사추모제에 한국대표로 초청되어 헌정한 의병아리랑이다. 국내 거주하고 있는 광주 고려인문화원 및 고려인합창단,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이 사는 인천, 김포, 양주 등에서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알려오고 있는 의병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오고 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소극으로 만들어서 무대화 하여 레파토리화 하고 있다. 성동구 거주하는 한 보훈가족(75세)은 "보훈의 날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주는 '아무르아리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주말이라서 마침 손자들과 같이 와서 더욱 의미가 깊다. 감사하다"라고 이회장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주었다. 휘날레가 끝났는데도 관객들이 계속해서 '앵콜'을 외쳐 주었다. 주말이라서 가족과 함께 온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전국아리랑공연연합회에서 축시를 보냈다. "우리 왕십리아리랑은 아리랑은 역사와 민족을 노래한다. 아리랑은 우리가 사는 땅을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역사를 노래한다 왕십리아리랑이 탄생한지 5년 이제 ‘아리랑의 아리랑’으로 자리한다 왕십리아리랑은 오늘의 우리 아리랑이다 구아리랑 긴아리랑 본조아리랑 정선아리랑 왕십리아리랑은 서울의 아리랑이다 이혜솔과 그들은 왕십리아리랑 전승자들이다 발표회를 하고 축제를 펼친다 제주도에서 정선까지 또 사할린까지 동포들과 외국 손님들과 우리들과 함께한다 아리랑의 역사를 아리랑의 위상을 아리랑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막내 아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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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과거시험 병폐와 커닝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새재는 ‘과거(過去)길’인가 ‘과거(科擧)길’인가?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 과거길’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답은 둘 다 맞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란 사설로 부르는 ‘아리랑고개’이기도 한 문경새재는 문경문화의 보고(寶庫)로서,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옛길이라 600여 년의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과거(過去)길’이다. 문경(聞慶)이란 지명은 ‘들을 문(聞)’과‘경사 경(慶)’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의 좋은 기운을 받아 장원급제란 꿈을 이루기 위해 추풍령이나 죽령보다는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로 넘어가길 원했다. 그러니 문경새재는 당연히 ‘과거(科擧)길’이다. * 표석은 ‘과거(科擧)길’란 의미로 세워졌음.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과 제3관문 조령관 사이, 옛날에 박석(薄石)이 깔려있었던 조금 가파른 구간이 있는데 여기를 ‘장원급제길’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과거 합격을 기원하는 ‘책바위’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 ‘초점(草岾)’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길을 ‘금의환향길’로도 부르고 있는데,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갈 때는 ‘장원급제길’이 되고 급제한 후 왕이 내린 합격증(홍패)을 지니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내려올 때는 ‘금의환향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式年試) 문과(대과)의 경우 3년마다 한 번 시행하며 최종 33명을 뽑는다. 그 외 부정기적으로 임금이 즉위할 때 보는 증광시(增廣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별시(別試),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다 하나 개인의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광이 되는 과거시험에 모두가 목을 매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급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러다 보니 사실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절망과 좌절, 실의에 빠져 낙향하면서 넘었던 수많은 선비의 애환이 쌓인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였고, 시에 능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다는 유우잠(1575~1635)이란 훌륭한 선비는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을까? 그 심정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이렇게 과거시험 합격은 어렵다. 조선 시대 때는 음서(蔭敍) 제도가 있어 과거 급제를 하지 않고도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 있지만, 조선 시대 유일한 공식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위해 큰 노력은 물론,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어떻게든 합격하겠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결국 부정행위까지 하게 된다. 과거시험 글제인 시제(試題)에 따라 그동안 공부한 지식으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기술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일종의 표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다고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병폐와 기발한 커닝 또한 빈번히 자행되었다. 한 예로, 과거시험 부정 중에서 아주 악질적인 것은 관리를 매수하여 과거 답안지인 시권(試券)에 수험생과 4조(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름 등 인적 사항을 적는 앞부분과 제술(製述)한 본문이 있는데 절차상 이를 분할하고 채점이 끝나면 다시 원상태로 붙이는데 그때 자기의 인적 사항을 합격 답안지에 붙이게 하여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적과(賊科)라는 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과거 시험장 분위기와 다양한 커닝 방법을 살펴보면, 수험생들은 옆 사람 것을 훔쳐보지 못하게 각각 6자(약 1.8m) 거리를 두었으며, 시험장의 좋은 자리로는 시험관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을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였다는데 이는 미리 준비한 쪽지 등을 감독관 몰래 슬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커닝 방법으로는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은 약과이고, 수진본(袖珍本)이라는 좁쌀책을 가지고 가는 것과 도포 자락 안쪽에 빼곡히 사서오경예상 답안을 써온 사람, 대리시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외부로부터 쪽지를 건네받는 사람, 붓두껍에 깨알 글씨로 작성한 예상 답안을 숨긴 사람, 콧구멍에 종이쪽지를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관을 뇌물로 매수하거나, 남의 글을 베끼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빌어 제출하는 차술(借述)이라는 행위도 있었다. 이렇게 커닝하다 적발되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시험장 안에서 책이나 문서를 가진 자가 발견되면 향후 2식년(2차례, 6년) 동안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한다. 남의 제술(製述)을 빌리는 차술(借述)이나 남을 위하여 제술해 주는 대술(代述)을 한 자는 곤장(杖) 100대에 도형(徒刑-징역) 3년의 중형을 주고, 영조 때 차술·대술의 형벌을 더 강화하여 조정의 관료나 생원·진사이면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유학이면 수군으로 삼았다. 낙방거자(落榜擧子)/ 이만유 괴나리봇짐 메고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난 한양간 과객 돌아오는 길 삐딱이 쓴 해진 갓 축 처진 어깨 꼬질한 도포 자락 문경새재 노송은 알고 있다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사연을 간절한 염원을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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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헝가리 한국문화원, ‘한국의 창窓 아리랑’ 열다!해외문화홍보원(KOCIS, 원장 김장호)과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원장 인숙진)은 올해 '코리아 살롱 1.5'라는 제목으로 총 4회에 걸쳐 인문예술 강좌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한류가 확산되며 한국 문화, 사회, 역사 등에 대해 궁금해 하는 현지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기획되었으며, 지난 4월 22일 토요일 ‘아리랑’을 주제로 부다페스트의 복합문화공간(Magvető Café)에서 첫 강연과 공연이 진행되었다. 본 강연에는 45년의 역사를 지닌 (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자 아리랑 연구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김연갑 씨가 강연자로 나섰다. 애국가와 민요 아리랑을 41년 간 연구해 온 김 이사장은 ‘아리랑은 한국의 창窓’이라는 주제로, 아리랑의 역사와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아리랑의 위상, 해외전파와 디아스포라 아리랑, 민요에서 모든 장르로 확산된 문화로서의 아리랑, 그리고 한류의 원류로서의 아리랑의 의미 등을 정치, 외교, 문화예술 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흥미롭게 풀어갔다. 특히 강연 서두에서 안익태선생이 1935년 ‘애국가’와 그의 첫 우리음악 작곡 작품인 ‘아리랑고개’ 합창곡을 작곡하기 직전 헝가리 음악가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에게 작곡 수업을 한 사실을 들며 헝가리 음악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 강연에 이어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다양한 아리랑과 각 지역의 민요를 모던 밴드음악으로 재구성하는 창작음악집단 ‘민요밴드 bob(비오비)’의 공연으로 그 열기가 더해졌다. 평창 아리랑, 경복궁 타령을 시작으로 펑크스타일로 재해석한 퓨전 형태의 노래와 연주곡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요와 아리랑의 다양한 변신을 보여주는 무대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무대 마지막에는 현지인들에게도 익숙한 본조 아리랑(영화 ’아리랑’ 주제가)을 관객과 함께 불러 아리랑의 중요한 가치인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김 이사장은 "작년부터 준비 중인 ‘헝가리 아리랑’을 올 가을에 발표할 예정이다”며, "이번 강연을 통해 헝가리 분들이 아리랑을 더 깊이 이해하고, 헝가리 아리랑도 많이 불러 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한 "헝가리 지식인들의 진지함에 책임감을 느낀다.”라고 전했다. 보컬 이수완 아티스트는 "헝가리문화원에서 기획해 주신 ‘코리아 살롱’은 헝가리인들, 헝가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과 함께 아리랑의 역사와 그 가치, 예술성을 나누는 자리에 아리랑과 우리나라의 민요를 들려드릴수 있어서 우리 가슴에도 아리랑을 새기게 되는 뜻 깊은 자리었습니다. 사실 외국분들께 노래를 들려드릴 때면 가사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 보다는 제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좀 더 전달해 드리는데 집중하려고 하는데요. 공연 내내 몰입해서 들어주시는 관객분들한테서 오히려 온전히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전했다. 밴드 ‘bob’의 해금 연주자 홍서연 아티스트는 "아리랑을 헝가리에 알리게 되어 영광이었고, 우리나라 민요가 생소해서 헝가리 현지 관객분들께 전달이 안되어질까 걱정했지만 반응이 뜨거워서 너무 놀라웠고, 역시 음악은 나라를 초월해서 하나로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헝가리 사람들은 역시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느꼈고 앞으로 아리랑을 포함한 우리나라 음악을 여러 나라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의 기획 프로그램 두 번째 강연은 6월 예정이다. 현재 헝가리문화원에서 전시 중인 한국 컨템포러리 사진전 <자연과 사람, 12인의 시선으로 노정한 한국현대사진전, ‘Korean Contemporary Photography Exhibition; Insights into Nature and Humanity>에 연계해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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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풍 같은 아리랑비 건립 100일기념 공연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신선하고, 강물과 구름은 유유히 흘렀다. 15일 12시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비 앞. 정성스런 제물이 차려지고 제문이 낭송되었다. "2022년 12월 5일 정선군과 정선아리랑보존회, 아리랑연합회와 40개 보존회가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을 다짐하여 유네스코 등재 10주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오늘 비 건립 100일을 맞아 ‘자발적 전승’, ‘형질 전승 유지’, ‘생활 밀착 활동’, ‘공동체 결속 기여’라는 창조적 계승 실천의 자리로 모였습니다. 원류로서의 정선아리랑과 동두천아리랑, 지류로서의 왕십리아리랑과 봄내아리랑이가 비교와 교류를 하는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 담론을 형성하여 논의를 확장시키는 장도 마련했습니다. 흠향!" 이에 모든 참가자가 재배하고 공연을 시작했다. 행사에는 특별히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 김남기, 김형조, 김길자 선생, 그리고 이현수 전승교육사도 참관하여 뜻을 더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후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주게/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정선아라리) 첫 출연은 정선아리랑보존회, 외지 출연단체를 맞는 의미로 정선아라리를 선보였다. 단촐한 장고 반주의 정선아라리는 아리랭이가 피어오르는 봄 누리를 잔잔히 적서 주었다. 아마도 외지 출연자들의 가슴도 적셔 주었을 것이다. 이어 (주)국악신문사 고문 이무성 화백은 주관사로써의 인사말에서 "이 아리랑비가 아리랑의 메카로서의 기능이 확정되어 세계적 명소가 되길 기원하며, 오늘 이 행사가 그 출발이 되길”바란다고 전했다. 아리랑 특강에 나선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기념비 지역은 청동기 유적으로서의 역사성과 한강 최상류 아우라지라는 지역성은 아리랑의 메카로서 이의가 없다”고 하며, "이 시기와 지역은 아라리 형성과 매우 밀접하다”고 '아리랑의 시원설'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이런 사실을 4월 24일 주헝가리한국문회원 초청특강에서 구체적으로 알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어진 공연은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 ‘왕십리아리랑’을 들려주었다. 본조아리랑을 근간으로 창작 되어 따라부르기 쉬운, 근래 넓리 불리는 창작 아리랑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 갈래요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아리랑 고개에를 함께 넘어요(왕십리아리랑) 왕십리 지역성과 역사 문화를 6절의 가사에 "아리랑 고개에를 함께 넘어요”로 아리랑의 형질을 담았다. 이혜솔 이사장 외 15명이 함께했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는 유은서 회장과 노옥진씨가 ‘동두천아라리’를 선보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 꽃이야 곱다마는 가지 높아서 못 꺽었나/꽃은 꺾어 머리에 꽂고 잎은 훓어다 입에물고 동산올라 구경하니 길가는 행인 왜 모르나/ 천하일색 나하나와 놀다가지 못하고(동두천아라리) 메나리제 전통 선율을 담고 있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는 2020년에 결성되어 지역에서 활발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 무대는 ‘봄내아리랑’으로 장식했다. 이번 무대가 초연인 만큼 많은 관심을 끈 막내 창작아리랑이었다. 춘천지역 전통 선율에 기반한 작곡, 역사적 지명과 유적의 유려한 표현, 창자 오승현의 농익은 목구성으로 불러준 유려한 선율로 신명이 올라가자 관객은 박수로 답했다.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아리랑고개가 왠 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 오근내 조근내 날아드는 봉황/소양강 맑은물 춘경 좋기로 봄내로군아 반짝이는 별빛 대룡산 눈꽃/의암호 물결 넘실넘실 웃어있네(봄내아리랑) 이번 모임은 작은 공연과 가벼운 강의를 겸한 렉쳐 형식이었다. 여기에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준비한 맛있는 봄나물 음식과 눈이 시로도록 파란 화창함이 더해져 참가자들은 ‘봄소풍’ 같다고 했다. 가는 길에는 정선아리랑보존회원들이 준비한 정선 특산품 수리취찰떡을 나누어 먹으며 아리랑 꽃을 피웠다. 한편 행사장에는 정선군 여량면 문용택 면장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이 자리에서는 이무성 화백의 ‘뗏목 정선아리랑’ 족자를 정선군에 기증하기 위해 전달 받기도 했다. 이무성 화백은 지난해 12월 5일 군수님의 건립식 기념사에 감명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주관사인 (주)국악신문은 앞으로도 ‘아리랑비’ 의 특화를 위해 소규모 모임과 관광객이 찾는 시기에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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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中)삼목 作 # 오사카 카페 ‘싸브’ 의 아리랑 1987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매년 일본을 방문했다. 북한 전문가 미야즈카 도시오宮塚利雄 前야마나시山梨학원대 교수를 만나거나 가이드를 받는 방문이고, KBS와 MBC 특집 프로그램 제작팀 일원으로 가기도 했다. 물론 모두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아리랑 관련 방문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MBC특집팀과 작가 김경원씨의 가이드로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아베安部씨의 인터뷰를 위해서 방일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고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의외의 인물은 오사카 거주 동포 트럼펫 연주자 김병수씨다. 한국 재즈 뮤지션들의 일본 활동상과 아리랑 서예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해외 첫 아리랑 재즈 편곡작인 오스카 패티포드(Oscar Pettiford)의 ‘아디동 부르스(Ah Dee Dong Blues’의 사연을 만나게 해 준 인물이다. 김병수씨를 섭외한 것은 오사카 지역 저명인사로 아베씨가 우익계 인물이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뜻에서 동행을 청하게 되었다. 그동안 아베씨는 남측 인사들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병수씨는 만나자 마자 역도산力道山 선생의 증언자라며 "역도산 선생이 술에 취해 혼자일 때는 아리랑을 불렀어요. 그 아리랑이 어떤 아리랑인지를 알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라며 취재 동행에 선뜻 응해주었다. 사흘 내내 시간을 함께 내주었다. 이틀간의 오사카 공식 일정을 마쳤다. 취재 목적인 아베씨에게서 ‘영화’아리랑‘ 필름 소장所藏 경위와 공개 시기 등에 대해 인터뷰를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필름을 찾게 되면 남북의 관계자들에게 공개하겠다는 등의 기존 주장을 되풀이 하였을뿐이었다. 다음 날 미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김 선생이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좋은 카페로 안내하겠다며 "한국의 째즈 뮤직션 강태환과 김대환이 자주 오는 곳이에요. 나도 가끔 셰션으로 연주하는 곳이지요.”라며 앞장서 갔다. 깜작 놀랐다. 김대환이 거명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반색하여 물었다. "드럼 친다는 김대환을 말하는 건가요?”라고.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맞아요”라고 짧게 대답하며 까페 ‘싸브SABU’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카페는 테이블이 4개로 좁았다. 그런데 카운터 겸 스탠드 구석에 드럼과 베이스가 세워져 있고, 음반 자켓 서너 장이 벽면을 장식하여 재즈 카페임을 보여주었다. 앉자마자 물었다. "여기에 드럼 치는 그 김대환이란 분이 자주 왔다는 말입니까?” "예, 그래요. 여기 주인 싸부 선생이 베이스 연주자예요. 김선생과 강태환과 여러 투어를 하였지요. 오사카에서는 여기가 재즈뮤지션들의 거점이지요.” 김경원 선생, PD, 카메라맨, 음향담당자를 따돌리고 그저 김대화선생에 대해서만 물었다. 의외의 사연들을 들었다. 너무나 중요하고 놀라 운 이야기들이다. 먼저 오사카예술대학을 졸업해서 다년 간 오사카에 거주했던 김경원 선생이 한 아리랑 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사카에 김대환 선생의 아리랑 글씨가 많아요. 애국가도 있고 아리랑도 있어요. 그런데 지난해 서울에서 봤는데 거꾸로 한자를 쓴 것도 있더라구요? 우수右手 글씨라고도 하던데요?” 이 말에 먼저 김병수 선생이 거들었다. 옆의 테이블에서는 차를 시키지도 않고 우리를 보고 무슨 얘기가 그렇게 진지하냐고 바라봤다. 김병수 선생이 말을 받았다. "이 카페에도 김대환 선생의 글씨가 있었어요. 작년까지 저쪽에 하나 붙어있었는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쓴 것이 있었어요.” 김병수 선생의 얘기대로라면 ‘애국가’의 후렴을 쓴 것이 분명하다. 김선생이 애국가 후렴을 썼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다. 이에 대해 김경원 선생이 의외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대환선생이 처음 일본에서 재즈투어를 하며 팬들에게 써준 것은 ‘애국가’ 후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조총련 측 팬들이 문제를 삼았다. 당연하였다. 그래서 북한 애국가를 쓸 수는 없고 해서 대신하여 쓴 것이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본 아리랑은 세 가지라고 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고 발병난다” 서울 인사동 까페 ‘청동시대’에서 본 아리랑 글씨의 존재 배경과 저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리하면 김대환 선생의 아리랑 서예 작품은 일본에서 팬들에게 서비스로 써주기 시작한 것으로 ‘애국가’ 대신으로 선택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 해도 독특한 필체의 작품 아리랑은 일본인들에게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아리랑을 알리는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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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봄내(春川)아리랑’!"소양강 맑은 물 춘경(春景)좋기로 봄내(春川)로구나 아리랑고개가 왠고개 쓰리랑고개 왠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 강원도 춘천의 풍광, 특히 봄의 풍경을 그린 아리랑이 탄생했다. ‘봄내아리랑’이다. ‘봄내’는 ‘春川’의 우리말이다. 이 아름다운 지명은 태조 왕건이 봄 풍경이 빼어나 ‘춘주春州’라 한데서 유래한다. ‘봄내아리랑’의 탄생, 1929년 파인 김동환의 ‘아리랑고개’로부터 시작된 창작아리랑은 60여 편에 이른다. 이에 의하면 이 ‘봄내아리랑’은 막내 창작아리랑이 된다. 이 봄내아리랑은 15일 아리랑 등재10주년 기념비 건립 백일 기념공연에서 발표된다. 발표하는 국악인은 오현승씨, 국악계에서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중진그룹으로, ‘진정한 국악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사패산 원각사 사무장(법명 眞德)이라는 신앙인, 서도소리와 향두계놀이 30여년의 활동, 사찰 사무장과 국악단체 사무국장이란 봉사자라는 평가에서 주목할 만하다. 봄내(춘천)아리랑 작사 작곡/이상균 소리/오현승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 아리랑고개가 왠 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 오근내 조근내 날아드는 봉황 소양강 맑은물 춘경좋기로 봄내로군아 반짝이는 별빛 대룡산 눈꽃 의암호 물결 넘실넘실 웃어있네 골골흐르는 곰내천 물길 공지천 따라서 의암호에 노니는구나 신용연 백로주 의암품에 숨고 봉의산성 푯말뿐이로구나 금병산 산마루 무성한 억새 광풍 불어도 꺽일 수야 있겠나 명봉 순정마루 흐드러진 들꽃 이름 없이 향기뿐이로구나 봄내 둘러친 구곡평풍 날아드는 백화 부르나니 함포고복 수새 곧은 은행나무 소박한 산까치 두루 펼친 의암호 산수좋은 우리봄내 후렴과 총 8절의 사설이다. 춘천의 지명 유래, 의암호에 의한 ‘호반의 도시’ 성격‘, 진산 봉의산의 위상, ’둔갑이 고개‘의 유래, 특히 대룡산과 의암호의 위용을 통해 춘천을 에워싼 풍광을 노래했다. 후렴은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아리랑고개가 왠 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이다. ’아리‘나 ’아리랑‘을 포함하는 2행 3음보라는 형질을 유지하고 있다. 작사, 작곡, 편곡자는 이상균선생이다. 이상균의 창작 아리랑 작업에는 이미 레거시(legacy)가 형성되었다고 볼 정도이다. 나름의 규정을 필요로 할만큼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14년 서도소리 유지숙 명인의 음반 ‘우리 아리랑’ 14곡을 통해 주목을 받았다. 제주아리랑에서부터 강동아리랑까지 14편의 아리랑 발표인 데, 굳이 규정하자면 ‘지명 아리랑 완창’으로 볼만하다. 이후 이상균의 작업은 두물머리아리랑, 숯고개아리랑, 양주아리랑, 포천아리랑, 김해아리랑에 이어 봄내아리랑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성가를 전통 시가 입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영사(詠史)아리랑’ 또는 ‘아리랑악부(樂府)’으로의 규정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사적을 계기로 삼아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빗대어 표현하거나 당대의 현실을 풍자 또는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시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강원무형문화재 1호,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3겹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다짐을 석비에 새운 것이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이다.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이란 자발적 전승 활동으로 형질을 유지하고, 생활밀착형 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활동은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현승의 봄내아리랑, 춘천 시민들에게 공감을 받아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불리기를 기원한다. 미음계의 자진타령장단. 후렴 6장단에 본절 6장단이다. 아리랑의 위상에 더해지고, 창조적 전승에 기여하길 바란다. 오현승의 봄내(춘천)아리랑 탄생!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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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경새재’도 아리랑?삼목 作 "선생님, 제가 보낸 카톡 사진 보셨어요? 점촌 버스터미널 사거리에 걸린 프랭카드인데요, 내일 강연 안내인데, 아리랑연합회 김** 선생 문경에 온다는 내용만 있어요. 아리랑 강연 내용은 없고요. 점촌 시내 곳곳, 문경읍 면 단위에는 200개나 부쳤다고 합니다. 재밌네요.” 문경시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아리랑 특강 안내 프랭카드. 내용이 아리랑을 강의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리랑 연합회 김**가 문경에 온다는 식의 표현이라서 어색하고 재미있다고 기찬숙 선생이 알려온 것이다. 이 시기 문경아리랑은 물론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12년 6월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연이었다. 강연 주제는 아는 이들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내용이다. 70분간의 강연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 나오는 ‘아리랑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문경새재가 바로 '아리랑 고개'라는 말입니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향입니다.” 이 요지의 강연을 계기로 문경지역에서는 소위 ‘문경아리랑 붐’이 일어났다. 당시 송옥자 회장이 문경아리랑을 알려오고 있었지만, 시청과 문화원과 일반인들에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인식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20년까지 문경지역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행해진 사업과 행사를 보면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망하게 이뤄졌다. 정선이나 밀양 또는 진도 지역에서 20여년간 이뤄진 것들이 한 시장의 5년 임기 내에 이뤄진 것이다. 대충 추려도 이럴 정도이다. 첫째는 문경새재아리랑제‘가 대규모, 정례화, 대외 행사로 확대, 개최 둘째는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공식화, 국회 정책발표회, 아리랑 가사 서예 작품화 셋째는 문경새재아리랑과 다듬이 소리 브랜드화 행사(광화문 천명 다듬이 행사) 넷째는 문경시 ‘아리랑도시’ 선포 다섯째는 경복궁 중수 후의 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의 연결고리 학술 담론화 여섯째는 헐버트 채보아리랑과의 연결, 독일 홈볼트 아카이부 독일포로 고려인 유리콜라이 아리랑 음원 전시 및 관련자 초청 행사 일곱째는 최초의 통속아리랑 H. B. 헐버트 채보 아리랑악보비 건립 여덜째는 문경시장 사할린아리랑제 동행 및 해외 연주자 초청 공연 아홉째는 민요학회 주최 문경새재아리랑 주제 학술대회 등 개최 열 번째는 전승단체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와 아리랑문화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양립 이상의 과정에는 문경시청이라는 관官의 지나친 주도로 전승주체가 소외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10여 년간 점령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 ‘아이디어만 빼 먹는 관’이라는 구태도 구설에 올랐다. 이 중심에 삼목이 있었다. 삼목은 이 아리랑 공사公事에 스스로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드러나게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와 그 위상이 정립 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문헌과 음반 기록으로 그 실체를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1896년 H. B. 헐버트가 기록한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대표사설은 이후 ‘구아리랑’에서부터 1926년 밀양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즉, 경복궁 중수(1865~1872)7년 기간에 문경의 새재에서 나는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공사장 도구 자루로 다 베어져 나간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이 새재는 경복궁 중수 기간 삼남의 부역꾼들이 반강제적으로 오가며 넘었던 고개이다. 여기에서 ‘새재’는 ‘고개’로, 고개는 ‘고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목은 1985년 헐버트 기록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1905년 오키타 긴조(㳞田錦城)의 ‘한국의 이면韓國 裏面’ 소재 아리랑 기사, 1925년 동아일보의 ‘박달나무 민요’. 1929년 ‘개벽開闢’의 ‘문경요聞慶謠’, 1930년대 이재욱의 ‘영남민요조사자료’의 문경지역 민요자료 등을 발굴하여 존재를 밝혀냈다. 이러한 문헌 전승을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확인은 거의 삼목의 몫이었다. 한편 이 시기 더불어 거둔 성과가 또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발매된 지역 아리랑 음반의 발굴이다. 즉,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가 발매한 최계란 소리 ‘대구아리랑(1936년)’이 2008년에 발굴되고,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발매한 서영신 소리 '동래아리랑(1937년)’이 2009년 발굴 되고, 같은 해 '신밀양아리랑(1936년)' 등이 신나라음반 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장소성을 부여한 강원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의 지명 아리랑이 뒤늦게 발굴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명 아리랑도 발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음반 수집가들에 의해 또는 대학 연구소 음원 아카이브가 주목한 장르는 판소리 명창 음반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손기정 선수 같은 역사인물의 육성 음반 등이었다. 지역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국적인 아리랑 신드롬과 함께 지역 아리랑 음반들에 관심을 보여 발굴되었다. 이에 의해서 ‘경주’, ‘춘천’, ‘문경’ 지명의 아리랑도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삼목으로서는 당연한 기대였으며, 국내와 일본 및 해외의 음반 판매사의 싸이트를 주목하고, 1930, 40년대 신문 광고도 살피게 되었다. 2017년 11월 초,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문경을 바쁘게 오가던 시기이다. 고속버스가 충주를 거쳐 점촌을 향하는 중에 기 선생 특유의 높은 톤이 들려왔다. 기 선생이 안국동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 색인 작업을 통해 ‘아리랑연표’를 작성하다 찾아낸 것이다. "포리돌 음반 광고에 ‘문경새재’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건 분명 문경새재아리랑인 것 같아요. 왜냐면 오태석과 정남희 반주에 조앵무와 임소향이 부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분명 이건 문경아리랑 음반입니다.” 나는 문경문화원 일을 보면서도 건성이었다. 마음 한쪽은 빨리 서울에 들어가서 기록을 보고 싶어서 다. "일제강점기 문경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는 기대는 했지만, 실제 그 존재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요 몇 년 동안 추정한 것이 실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니 신비하기도 했다. 급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 온 삼목은 기 선생이 출력해 놓은 조선일보 1939년 1월 19일자 ‘포리도루 조선음반 신보’ 광고를 보았다. 분명하게 2월 신보 광고란에 ‘聞慶새재’가 들어있다. 반주자 두 분과 노래한 두 분도 분명히 나와 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없을뿐이다. 그러나 삼목은 확신을 했다. 여러 문헌에서 ‘아리랑’이 붙지 않은 ‘문경요’나 ‘박달나무 민요’가 모두 문경아리랑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성경린과 장사훈이 펴낸 ‘朝鮮의 民謠’에서도 ‘聞慶새재’로 곡명을 달았는데, 그 가사는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그런데 이 광고만으로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실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광고 게제 일시와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음반은 발매 되지 않고 광고만 나왔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고만 나오고 발매는 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여년이 지나도록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이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찾기 시작했고 관련 기록을 수소문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매일 색인 검색을 하는 김종욱 선생에게 부탁한 결과 의미있는 자료가 왔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8년 7월 17일자와 9월 25일자 경성방송국(JODK)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가 송출되었음을 확인했다. 여기에 따르면 부른 이는 다르지만 같은 반주자에 의해 방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음반 발매 여부와는 또 다르게 ‘문경새재’가 국악인들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광고자료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음반 존재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를 언론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기 선생은 "우리가 음반을 찾고 발표해야지 이 자료만 알리면 안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그 음반 찾게 되면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눈이 밝아서 '최초 발굴'이라고 떠들면서 찾았다는 기사를 내는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삼목으로서는 누가 찾든 빨리 음원을 확보하여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제고하고, 연구 자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드디어 2017년 11월 3일,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을 통해 문경매일신문과 대구매일신문에 자료를 공개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여몄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이 기사는 ‘문경새재’라는 음반명과 곡명을 아예 ‘문경새재아리랑’으로 특화, 단정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 또는 ‘문경아리랑’으로 특정, 검색 키워드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음반이나 기타 문헌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기사로 문경과 소장자들에게 전해져 반향이 컸다.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이 공감을 표해왔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도 "문경아리랑이 다른 지역 아리랑과 함께 중요한 위치였음을 확인시켜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기사의 결과가 나왔다. 존재에 대한 기사가 나간지 1년,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면 관장이 소장 자료를 공개했다. 광고 문안과 동일했다. "Polydor X-517-A(10386BF) 南道雜歌 梅花打鈴·聞慶세재 吳太石·丁南希·曺鸚鵡·林素香 伴奏 韓成俊·金德鎭·鄭海時” ‘南道雜歌 聞慶새재’ 불은 라밸의 폴리도루 음반, 너무나 반가운 음반이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노재명 관장이 가사지歌詞誌까지 발굴, 공개했다. 획기적인 발굴이다. 이로서 3절의 가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중모리)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야 눈물이 난다.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밭을 매고 저 논 갈아 양친 부모님을 봉양허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물을 건너고 저 산 넘어 우리 님 계신 곳을 찾어가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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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本調가 뭐야?”(하)삼목 作 이튿날 상기된 얼굴로 奇 선생이 찾아왔다. 이어 시인 최(광린) 선생도 관심을 갖고 찾아와 비좁은 원서동 자료실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奇 선생은 K교수 주장의 부당성을 논문화하겠다며 몇 년 전의 스터디노트를 펼치며 본론으로 직진했다. K교수가 ‘조선의 민요’에서 본조를 "처음 사용된 명칭”이란 것을 "처음 본조아리랑을 확정하였다”로 오독誤讀한 수준이고, 갑작스럽게 "서울시를 엄두에 두고 서울아리랑을 들고 나선 것은 불순하다"는 주장이다. 奇 선생의 다소 감정적인 대응 논리에 최 선생이 그것보다는 더 본질적인 문제로 장사훈 교수의 본조아리랑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다. 장사훈 교수! 삼목에게 30여 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게 했다. 30대 중반, 사방팔방을 다니며 애국가와 아리랑 자료를 추스르던 시기, ‘예술인의 마을’에 살던 장사훈 교수댁을 오갔다. 1982년 서울대에서 정년을 마치고 청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시기였다. 삼목의 관심사인 ‘대한제국애국가’ 작곡가 에케르트(譽啓爐/汝巨多/어: Franz Eckert, 1852~1916)에 대한 자료와 당연히 아리랑에 대한 자료를 구득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51년 국악개론서 ‘국악개요’ 내용에 대한 민요자료와 관련 에피소드를 얻는 목적으로 한 계절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덕으로 1991년 작곡했을 때 KBS라디오 ‘장인백선’ 프로그램을 집필할 때 추모특집을 제작하기도 했다. 삼목의 과거 행적을 奇 선생이 현실로 불러냈다. "장사훈 교수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다시 해 주세요. 여기 메모에는 장례식도 참가했고, 추모 프로그램도 제작했었다면서요. 그때 아리랑에 대해서도 얘기했다면서요?” "그야 당연하지, 꼭 찝어서 질문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얘기를 많이 들었지. 당시 성경린 선생님이나 자신은 아리랑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거야. 해방직후 개론서가 필요해서 국악 전반을 알리는데 주력을 했다는 거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리랑 같은 민요는 음반업 종사자나, 공연 연출가, 연주자, 경기민요 창자 정도나 관심을 가졌던 상황이란 것야, 그런데 핵심적인 얘기를 하셨어, 뭐냐면, ‘본조’라는 말은 자신들이 한 말이 아니라 공연계 연출가들이 한 말로 연극, 무용, 만담 같은데서 중심적으로 쓰는 영화‘아리랑’ 주제가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지. 당시는 아리랑하면 바로 주제가‘아리랑’을 말하는 정도였다는 것이지” 이에 두 사람은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기 선생이 이를 방증하는 자료라며 석사논문에서 인용했다는 두 가지 자료를 내놓았다. "아리랑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영화 <아리랑>과 이 영화 주제가 <아리랑>과 함께 조선 영화계에서 보지 못한 센세이슌을 일으키었으니 지금도 그 ‘아리랑’ 노래 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춤에도, 연극에도, 지금의 영화에도 이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조선일보, 1940, 2, 15. ‘걸작 아리랑 만들고 마음대로 살다간 나운규’) "아리랑의 민요가 혹은 무용화가 되고 혹은 영화화가 되었으나 극화가 된 것은 토월회의 금번 공연이 처음이라 하겠다. 첫째 제재를 거기에서 취한 것부터 매우 기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이 얼마나 많은 흥미를 끄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 누구든지 친함을 가진 민요이다. ‘아리랑고개’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별문제라고 하더라도 ‘아리랑고개’는 마음 깊이 우리들에게 하소하는 바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쯤은 어찌함인지 조선 땅의 모든 것과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이 꼭 들어 맞는 감을 준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동아일보, 1929, 11, 26) 매우 의미있는 자료이다. 영화주제가‘아리랑’이 왜 ‘본조’라는 위상을 얻게 되었는가라는 배경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 선생도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했다. "그러면 서울대 교수로 가서 국악연구로 유명세를 얻는 장사훈 교수의 아리랑론이라고 볼만한 어떤 체계나 흐름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나요? 그게 궁금하고, 그 중에 본조아리랑을 어떻게 기술했는지가 궁금하네요.” 삼목은 책장에서 미리 빼 놓은 장 교수의 국악개론서 ‘국악개요’·‘한국음악사’·‘국악개론’·‘국악총론’을 내보이며, 본조아리랑에 대한 기록을 제시했다. "사실은 아리랑에 관한 글은 장교수님이 가장 많이 썼어요. 내가 확인한 것만 봐도 토막 글을 포함해서 5편이나 있으니까요. 이 시기에는 양주동 박사나 임동권 선생보다 더 많아요. 이 중에 앞에서 거론한 공편 ‘朝鮮의 民謠’ 이후에 초초의 단독 저서인 ‘國樂槪要’(1951년 정연사)를 보면 매우 의미가 있어요. 뭐냐면 이 책의 아리랑 대목은 3쪽 정도로 확대하여 거론하였는데 언급한 대상 아리랑은 문제의 ‘朝鮮의 民謠’와 같아요.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 이렇게 9종이예요. 그런데 본조에 대한 해설이 이래요. 한번 비교해 봐요”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요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과 같은 곡조이나 이 밖에도 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아리랑세상·별조아리랑·긴아리랑·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등 그 종류가 많다.” 분명히 1951년 시점에서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같은 곡조로 널리 부르는 아리랑이라고 했다. 곧 1949년의 ‘朝鮮의 民謠’나 이 책의 본조아리랑은 곧 오늘의 본조아리랑과 같은 것으로 결코 K교수가 주장하듯이 헐버트 채보 아리랑(舊아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장 교수가 덕성여대 교수시절 본격적인 아리랑론으로 ‘민요해설 아리랑의 유래’를 1958년 ‘교통’ 44호에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총 7쪽 분량의 논고 중 해당 부분은 이렇다. "이 아리랑에는 이른 바 본조아리랑이라 하여 우리가 항용 듣고 부르는 아리랑이 있고, 그 밖에 밀양아리랑~ ” 1958년 시점에서 "우리가 항용 듣고 부르는 아리랑”이 본조아리랑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이 시기 헐버트 채보 아리랑(舊아리랑) 곡조가 항용 불리는 아리랑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본조아리랑임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장 교수의 일관된 본조아리랑관觀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상을 들어 정리하면 이렇다. 즉, 성경린과 장사훈이 ‘본조’를 처음으로 언급한 문제의 ‘朝鮮의 民謠’ 중 ‘본조아리랑’은 영화주제가‘아리랑’으로 오늘의 ‘본조아리랑’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후 장사훈 교수의 글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주제가‘아리랑’에의 ‘서울아리랑’ 명명 부여는 이미 헐버트 채보 아리랑(구아리랑)을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으로 음반화 하였기 때문에, 이 역시 불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K교수나 이에 동조한 Y교수의 주장은 오독과 오판임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세 사람의 두 시간 정도의 논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K교수와 Y교수의 주장이 이상과 같은 오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서울아리랑’의 특화를 위한 목적에서 한 주장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고, 두 전직 회장의 발언이 학술회의에 함께한 회원들이 어떻게 수용될지도 문제이다. 기 선생의 논문이 이를 잠재울 수 있을지가 더욱 궁금하다. 2023년 2월 말쯤 아리랑학회 정기 학술회의에서 발표한다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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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本調가 뭐야?”(상)삼목 作 "朝鮮에도 民謠가 있다. 四千年의 오랜 歲月을 두고 이 겨레의 착한 性情이 純一하게 發露한 게 곧 우리의 民謠이다.” "朝鮮民謠 중에서 가장 널리 普及된 것으로 적어도 朝鮮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면 이 노래(아리랑)를 모르지 않는다.” 겨레의 착한 성정으로 부르는 것이 민요이고, 그 민요 중에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이는 1949년 발행된 ‘朝鮮의 民謠’ 공편자共編者인 성경린成慶麟과 장사훈張師勳의 인식이다. 전자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로 이미 ‘조선의 아악’(1947), ‘조선음악독본’(1947)을 지은이요, 후자 역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이다. 그리고 함께 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이력으로서 당시로서는 민요나 아리랑뿐만 아니라 국악 전반에 대한 해석권解釋權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데 최근 한 학회에서 ‘‘朝鮮의 民謠’를 들어 기존의 아리랑 명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란을 촉발시킨 바가 있다. 이로서 삼목의 ‘한국의 아리랑문화’ 외에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던 이 책의 아리랑 언급이 오랜만에 소환되기에 이르렀다.(문제를 제기한 이도 삼목의 책을 보고 반론으로 제기한듯하다.) 2022년 10월 초, 기奇(찬숙) 선생의 통화음이 다급했다. "혹시 학술회의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끝났는데요. K교수가 논평하면서 '본조아리랑'은 주제가 아리랑이 아니라, 1894년 헐버트 채보 아리랑이고, 주제가 아리랑은 '서울아리랑'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 근거가 제가 듣기로는 성경린과 장사훈 공편 ‘조선의 민요’를 거론한 것 같아요. 그런데요~?” 기 선생이 다급한 어투와는 다르게 조금은 미심쩍은 투로 말끝은 흐렸다. "그런데라니요? 그게 뭐요? 또 뭐가 있었나요?” 기선생이 이 본조아리랑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한국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문학사전’ 표제어 ‘본조아리랑’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목과 함께 ‘아리랑 스터디그룹’에서 많은 논의를 한 주제로, 다양한 전거典據를 들어 스터디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사전 편찬의 책임자 중 한 분이 뒤늦게 자신이 참가한 사전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항목의 본문 일부는 이렇다. "본조(本調)아리랑은 주제가‘아리랑’으로 출발하여 ‘신민요 아리랑’, ‘유행가 아리랑’으로 불리다가 ‘신아리랑’ 또는 수식 없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본조아리랑은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 ‘조선의 민요’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다. ‘본조’는 1940년대 말 국악계에서 사용한 용어로, 음악적 원류(源流)나 본류(本流)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의 확산 장르에서 본(本)·원(元)·중심(中心)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용어이다.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아리랑과의 변별을 위해 1960년대에 일반화된 것이다.”(기미양, 본조아리랑,한국민속문학사전) 분명히 본조아리랑은 1926년 개봉된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를 지칭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 ‘본조’의 의미는 음악적 본류의 의미가 아니라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술상에서나 공연분야에서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틀렸다고 한 것이다. 삼목은 기 선생이 말끝을 흐린 것이 마음이 쓰여서 다시 되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요? K교수가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학술대회에서 서울아리랑으로 하자는 주장은 있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주장한 바가 있는 거 아녜요? "예 그렇긴 한데요. 이번에는 좀 감정이 실렸어요. 100% 정확한 워딩은 아닌데, M학회가 있는 한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논리나 팩트에 의한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마치 M학회가 유권해석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하필 내가 전화를 받느라 컴퓨터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있어서 듣지 못했는데. 참. 뭐예요?” "예, 그에 대해서 논평자로 참가한 Y교수도 동의를 했어요. 두 전직 학회장이 이런 식의 발언을 한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그렇다. 우선 감정적인 부분은 두고, 팩트를 다시 체크하기로 했다. 삼목은 다시 서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간행된 국악개론서들에서 아리랑 언급 부분들을 체크했다. 특히 ‘본조아리랑’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성경린·장사훈의 민요 사설집 ‘朝鮮의 民謠’를 찾았다. 이 책의 일러두기에는 참고한 서명이 나오는데, 속가집·조선민요선·가곡보감·가요집성·가요집 등에서 사설을 간추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민요집이 사설 중심의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음악적 창을 주안主眼으로 본 가사, 후렴, 구호 등 확연하게 구별하여” 수록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 선생의 집필에서 분명히 한 것이 이 가사집에서 ‘본조아리랑’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 것이지, 이 책의 ‘본조아리랑’ 기록(해석과 사설)이 반드시 본조아리랑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란 뜻은 아니다. 주관처에서 원고 내용을 줄여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부분은 삭제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제 실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자. 이 책의 첫 아리랑은 경기도편의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 5편이다. 이어 강원도편의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평안도편 긴아리·경상도편의 밀양아리랑, 전라도편의 진도아리랑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 그리고 긴아리랑이다. 우선 문제의 세 편의 사설과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本調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①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②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한다 ③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④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⑤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⑥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가네 ⑦아 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⑧신장로 가장자리 아카낢은/ 자동차 바람에 춤을 춘다 ⑨먼동이 트네 먼동이 트네/ 미친님 꿈에서 깨여나네 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新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②성황당 까마귀 깎깍짖고/ 정든님 병환은 날로깊어 ③무산자 누구냐 탄식마라/ 부귀와 빈천은 돌고돈다 ④감발을 하고서 주먹을 쥐고/ 용감하게도 넘어간다 ⑤밭 잃고 집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⑥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⑦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⑧쓰라린 가심을 움켜잡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⑨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메인다 ⑩원수로다 원수 로다/ 총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⑪일간 두옥의 우리 부모/생각할수록 눈물이 난다 ⑫아리랑고개는 얼마나 멀게/ 한번 넘어가면 영 못오나 ⑬우리의 성립 군아/ 뜻과 같이 성공을 하세 긴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 구료/ 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①만경창파 거기 둥둥 뜬배/ 게 잠깐 닻주어라 말 물어보자 ②기차는 가자고 왠 고동을 트는데/ 님은야 팔을 잡고 낙루만 한다 ③우연히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회를 더욱 산란케한다 ④달도 밝고 별도 총총한데/ 임은 날 버리고 왜 아니 찾노 ⑤물속에 뜬 달과 낭군의 맘은/ 잡힐 듯 하고도 내 못 잡아 ⑥누구를 보고자 이 단장했나/ 임가신 나루에 눈물비 운다 이상 세 편에서 해설이 있는 것은 두 편이다. 그런데 이 중 유의미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본조아리랑-"서울의 것을 본조아리랑 그 밖에 밀양아리랑~ ” 긴아리랑-"아리랑에서 가장 일쯕이 생긴 거라고 하지만~ ” 이상과 같이 매우 소략하다. 여기에서 ‘본조아리랑’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란 부족하다. 그 이유를 짚어 보자. 첫째는 본조아리랑의 해설에서 단지 서울에서 불리는 아리랑이란 정도일뿐이라고 했고, 긴아리랑 해설에서는 헐버트 채보 아리랑 즉 구아리랑 또는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장 오랜 긴아리랑이 가장 오랜 것이라고 했다. 정리하면 전자는 지역적 분류 정도이고, 후자는 분명한 오류인 것이다. 둘째는 제시된 本調아리랑과 新아리랑의 사설에서도 '구아리랑'인지 '본조아리랑'인지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奇선생이 본조아리랑 사설로 제시한 것을 대비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본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본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신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본④-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왠말인가 이상에서 대비한 바와 같이 ‘긴아리랑’을 빼고는 사설만으로는 독자성을 갖지 못함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첫 자료 ‘본조아리랑’은 명칭만 본조아리랑이지 실제는 구아리랑과 또 다른 아리랑 사설들의 모음일 뿐이다. 물론 후렴과 일부 사설들이 ‘구아리랑’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칭들은 특별한 인식 없이 편의적으로 부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신’이나 ‘긴’에 대해 변별로서의 ‘본조’를 부여한 것일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K교수가 이 책을 보고 ‘구아리랑’(헐버트 채보 아리랑)을 ‘본조’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 곡명을 ‘서울아리랑’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이 이 책이 명명한 본조아리랑은 그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임으로 타당성이 없다. 또한 음반 역사에서는 이미 ‘구아리랑’을 ‘서울아리랑’(‘京卵卵打令’/1913년 N6170/1928년 V49047)으로 명명하였음으로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 아닌 서울아리랑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주장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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